수미쌍관 III

-최재경-

III.

서혁은 중고등학교 시절 아인슈타인과 황순원을 좋아하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아인슈타인 전기를 여러 번 읽었고 황순원 전집은 모두 읽었다. 그러고는 뉴턴, 갈릴레오, 페르미 등의 전기도 읽다가 결국 수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기에 나오는 위인들이 너무 뛰어난 천재라는 사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어렸을 때 혼자 증명하였고, 뉴턴은 대학교 재학 중 미적분을 창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위인 앞에서 서혁은 자꾸 왜소해졌다. 고민하다가 소설가가 돼보려고 문과 반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소설가도 쉽지 않아 보였다. 소설책의 맨 뒤에는 보통 소설에 대한 비평가의 평이 실린다. 그러나 그 평을 읽어보면 서혁이 소설을 읽으며 도저히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문제점과 시각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소설가는 더욱 힘들어 보였다. 실망한 나머지 고3으로 올라갈 때 서혁은 이과 반으로 옮기고 말았다. 천재 수학자 가우스, 리만의 백분의 일 정도만이라도 되어볼 생각으로. 이런 서혁에게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였다.
“황순원의 백분의 일 정도의 글도 써보게나.”

서혁이 나에게 구름다방에 관해 얘기해준 것은 최근이었다. 1년 전부터 다니던 다방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숨김없이 해주던 그가 이렇게 뒤늦게 얘기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구름다방에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들른다고 했다. 그 다방에는 시인, 소설가 등 예술가들이 주로 모이는데 다방이 5층 건물의 3층에 있어서 손님은 별로 많지 않고 주로 단골손님들로 채워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3층에 있는 다방은 자기도 처음 봤는데 그런 높은 곳에 있어서 구름다방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다방이 있는 건물도 특이하지만 다방 자체도 색다르다고 오늘에야 서혁이 내게 고백하였다.

“시인, 소설가들이 모여 다방에 죽치고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 시를 쓰거나 소설 구상을 하곤 하지. 그런데 구름다방에서는 신기하게도 멋진 시가 써지고 재미있는 소설이 나온다고 해. 그것을 한번 경험하게 되면 자꾸 구름다방에 올 수밖에 없지. 구름다방에는 즉흥시를 읊고 흥미로운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이 매일 있다네. 신기하게 나도 구름다방에서 수학 문제를 풀면 평소보다 곧잘 풀리지 않겠나.”
“그런 다방이라면 색다른 다방이라고 말할 만하겠네. 5층 건물의 중심에 있어서 그런가?”
“그런데 말일세. 이 다방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네. 구름다방에서 멋진 시를 쓴 뒤 집에 가려고 건물을 나오면 그 시구가 하나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닌가. 나도 그랬어. 내가 구름다방에서 어려운 정리를 모처럼 증명해서 신이 났었지. 그렇지만 건물 밖으로 나오니 그 증명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그 이후에 또 증명에 성공했을 때는 종이에 적어놓았었지. 그런데 건물 밖에서는 그 종이가 백지로 돌아간 거야. 참 기이한 곳이 아닌가.”
“기이하다 못해 괴이하구먼. 구름다방에 가는 예술가들은 다 구름에 붕 뜬 사람들인가 보군.”
나는 서혁에게 빈정거렸다. 서혁이 계속하였다.
“구름다방에서 나오면 들어가기 이전의 평범한 상태로 돌아가게 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자꾸 들르게 되지. 구름다방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기분은 고조되고, 상상력은 풍부해지고, 창의적이 되니까. 그런데 놀랄 만한 비밀이 두 가지 더 있다네.”

나는 궁금해졌다.
“이 비밀은 구름다방이 있는 5층 건물에 관한 것이야. 그 건물 1층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어. 모든 사람은 한 문으로 건물에 들어와서 각각 할 일을 한 뒤 같은 문이나 다른 문으로 나가게 되지. 그런데 말일세, 만일 한 사람이 동문으로 들어와서 건물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고 다시 반 바퀴를 더 돌아 서문으로 나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네.”
서혁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자기를 쳐다본다는 것을 알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 사람은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뀌게 돼. 얼굴 왼쪽에 있던 점은 오른쪽에 보이는 거야. 그리고 오른손잡이는 왼손잡이가 돼. 신기하지?”
나는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세 번째 비밀은 한 사람이 남문으로 들어와서 건물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반을 돌고 북문으로 나가면 그 사람의 몸은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생체나이는 1년을 더 먹게 된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나이도 한 살 더 먹지. 더 성숙해진단 말이야.”
나는 놀라지도 않았다. 물론 믿어지지도 않았다. 서혁은 수학 이야기를 꺼냈다.
“동문과 서문을 지나면 왼쪽 점이 오른쪽으로 옮겨 간다는 것은 이 건물이 방향을 줄 수 없는(nonorientable) 공간이라는 말이야.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은 방향을 줄 수 있는 공간인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 출발점에 돌아오든 왼쪽 오른쪽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지. 예를 들어 ‘뫼비우스의 띠’는 방향을 줄 수 없는 2차원 도형이야. 그런데 말이야, 구름다방의 건물에서 한 사람이 동문 서문을 지나면 왼쪽 오른쪽이 바뀌지만 막상 그 사람은 변화를 느끼지 못해. 자기의 얼굴에는 여전히 점이 왼쪽에 있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점이 오른쪽으로 옮겨진 것을 보게 돼. 쉽게 얘기하면 3차원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 이 건물 안에 놓여 있는 거야. 그렇지만 그 사람이 한 번 더 동문 서문을 지나면 오른쪽의 점은 다시 왼쪽으로 옮겨 오게 돼.”
“그 사람이 동문 서문을 홀수 번 지나면 왼쪽 오른쪽이 바뀌지만 짝수 번 지나면 바뀌지 않겠구먼.”
내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수학 얘기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서혁이 셋째 비밀 얘기를 다시 꺼냈다.
“남문과 북문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극단의 선택을 한 사람도 있을 거야.”
“극단의 선택?”
“남문 북문을 여러 번 통과해서 최고의 수준으로 정신을 고양시킨 다음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겠지. 그러고는 많이 늘어난 생체 나이 때문에 요절하지 않았을까?”
“요절한 천재 예술가 중에는 구름다방 건물을 거쳐 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그런 기이한 건물을 누가 어떻게 지었을까?”
서혁이 대답하였다.
“나도 참 이해할 수가 없어. 외관이 멀쩡한 건물 안에 어떻게 그런 믿을 수 없는 공간이 숨어 있는지. 기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납득이 안 돼. 그런데 수학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아.”
“그럼 쉬운 수학으로 내게 설명해봐.”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놀다 보면 바지 무르팍에 구멍이 생기곤 했지. 그러면 어머니가 동그란 헝겊 조각을 대고 기워주셨어. 그런데 만일 헝겊 조각이 복잡한 모양이라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도나쓰 표면 같은 헝겊 조각이 있는데, 그것도 해져서 동그랗게 구멍이 파였다고 생각해봐. 그래서 바지의 구멍과 헝겊 조각의 해진 구멍을 따라 서로 꿰매면 좀 복잡해지긴 해도 바지의 무르팍 구멍은 없어지게 되지.”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억지이긴 해도 바지에 더 이상 흙은 들어가지 않겠지. 수학에서는 이렇게 두 공간에 각각 구멍을 내고 두 구멍을 따라 연결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을 ‘연결합(連結合, connected sum)’이라고 불러. 정태가 두 개의 도나쓰를 만들었다고 해봐. 그리고 빼빼로 같이 구멍이 없는 빵 조각으로 두 개의 도나쓰를 서로 이으면 하나의 도나쓰가 될 거야. 이것이 두 도나쓰의 연결합인 것이야. 원래의 도나쓰는 각각 구멍이 하나인데 이 연결합은 구멍이 두 개이지. 한 술 더 떠서 이 구멍이 두 개인 도나쓰와 다른 도나쓰의 연결합도 만들 수 있지. 연결합을 쓰면 온갖 복잡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구름다방 건물을 지을 때 연결합이 이용된 것 같아. 건축가가 일단 건물을 평범하게 지은 다음, 중심 부분과 동서남북의 문을 포함한 부분을 깎아내고 나서, 복잡한 위상을 가진 3차원 도형과 연결합을 시켰을 거야. 이런 건축 방법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방법으로밖에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불가사의하군.”
서혁이 계속하였다.
“자네 황진이의 그 유명한 동짓달에 관한 시 알고 있지.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동짓달 밤이 그저 긴 밤이라고 하는 것은 범인(凡人)이 하는 말이지. 마치 구멍 난 바지에 동그란 헝겊 조각을 기워서 원래의 평범한 바지 모양으로 만들듯이. 그러나 황진이처럼 동짓달 기나긴 밤을 이불 아래 넣었다가 다시 펴서 쓸 수 있는 밤으로 보는 것은 구멍 난 바지에 도나쓰처럼 생긴 헝겊 조각을 꿰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어. 황진이의 시적 변용은 수학의 연결합과 상통한다는 말이야.”
“그럴싸하네.”

“황순원의 단편소설 중에 '링반데룽'이라고 있어. 그 줄거리는 주인공이 광견병에 걸린 친구에게 문병 가서 느낀 것에 관한 이야기야. 주인공은 친구가 마지막이 가까워져서 경련 속에서 눈앞을 걷어내며 초점을 잡으려고 애쓰면서도 못 잡는 듯한 시선이 하나의 뜻을 지니고 가슴에 와 부딪친다고 느끼게 돼. 그러고는 친구의 과거를 회고해. 친구는 못하던 영어 공부에 몰두해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는 중학교 영어 교사와 법대 강사를 2년씩 하다가 교단에서 물러나고 말아. 그러고는 한동안 여색에 철저하게 빠져. 그런 뒤 친구는 등산에 빠져서 여기저기 산을 찾아다녀. 이때 그는 주인공에게 링반데룽 현상이라는 등산 용어를 가르쳐줬어. 이 기억이 떠오르자 주인공은 갑자기 깨닫게 되지. 친구가 눈앞을 걷어내며 초점을 잡으려는 것에서, 교단생활에서, 여러 여자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등산에 몰입한 것에서 친구는 링반데룽 상태를 느낀 것이라고 주인공은 생각해. 친구 자신은 인생에서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나 마침내 자기는 어떤 환상 방황의 헛된 원을 그리고 있었다고 느낀 것이라고. 그리고 소설은 주인공이 1년간 사귀고 있는 여인과의 이야기로 넘어가. 이 여인과 여러 번 만나면서도 자꾸 헛도는 것은 링반데룽이나 다름없다고 주인공은 깨달아. 그러고는 문병 간 친구 집을 나서며 오늘 만나기로 한 여인과 진정한 만남을 이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재미있는 소설이네.”

“이 단편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황순원은 연결합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어. 등장인물들이 다양하게 살아온 이야기들을 그냥 평범하게 전개했다면 장삼이사의 흔해빠진 스토리가 됐겠지. 동그란 헝겊 조각으로 기워진 바지같이 말이야. 그러나 친구와 주인공의 삶에서 생긴 사건들을 각각 하나의 빈 공간(구멍)으로 보고 그 공간을 링반데룽이라는 특이한 공간(헝겊 조각)으로 연결한 것이 작가의 소설 기법이었던 것이야. 작가는 매우 재미있는 연결합을 만든 것이지.”
“자넨 비평가 소질도 있군.”

“아까 내가 뫼비우스의 띠는 방향을 줄 수 없는 2차원 도형이고, 구름다방의 건물은 방향을 줄 수 없는 3차원 공간이라고 말했지. 그런데 뫼비우스 띠 안에 살고 있는 2차원 존재는 왜 자기네의 공간에 방향을 줄 수 없는지 알지 못해. 그냥 한 바퀴 돌아보니 남들이 자기보고 좌우가 뒤바뀌었다고 말해주니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지. 그런데 뫼비우스 띠를 3차원 공간 속에 집어넣고 띠 밖에서 쳐다보면 그 띠에 왜 방향을 줄 수 없는지 우리 3차원 인간들은 쉽게 지각할 수 있어. 이 같은 확장을 구름다방 건물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다시 얘기해서 3차원 건물을 4차원 공간에 집어넣고 건물을 벗어난 위치에서 응시하면 구름다방 건물에 왜 방향을 주기가 불가능한지 알 수 있지 않을까?”
“4차원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어지러워지네.”

“이론적으로는 3차원 도형을 6차원 이하의 공간에 집어넣고 바깥에서 조망하는 것이 가능해. 구름다방 건물처럼 덜 복잡한 공간이라면 4차원에서도 가능하지. 그런데 우리 인간은 3차원적 존재야. 물론 시간을 제외하고서 말이지. 3차원적 인간이 4차원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동서, 남북, 상하의 3차원 밖에 또 1차원이 있다면 그 방향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 그러나 뜻밖에도 4차원 이상의 고차원 공간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수학자들은 추상적으로 공간을 다루면서 고차원 공간을 이해할 수 있어. 고차원 공간도 인간이 깊이 생각하면 저차원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돼. 즉 추상적인 공간은 인간의 인식이 가능한 대상인 것이야. 그렇다면 인간이 매일 살고 있는 현실적인 공간은 어떤가? 구름다방의 건물이 동문 서문을 따라서는 방향을 줄 수 없고 남문 북문을 지나면 시간이 바뀌는 괴상한 건물이라면 우리는 필시 그 건물을 4차원에 집어넣고 바깥에서 투시해야 그 건물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야.”

추상적이던 서혁의 말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뿐 아니라 우리의 복잡한 인간관계도 고차원에서 보면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거야.”
“말이야 쉽지.”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현실을 4차원 공간 속에 집어넣고 나름대로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는걸. 각자 매 순간 새로운 4차원의 방향을 창조해서 그 방향으로 현실의 의미를 부여하며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이런 행위 자체가 현실을 4차원 공간에 집어넣는 수학적 행위인 거야. 우리 각자는 현실을 살며 수학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시인의 시심은 그 4차원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어. 그 4차원 방향을 통해서 신이 시인에게 말을 걸어주곤 하지. 인간 사이에 4차원 방향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소설가의 임무야. 인간관계를 재미있는 4차원 곡선으로 그리는 게 그의 소설이지.”

서혁의 시, 소설, 수학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그는 상기돼 있었고 그의 눈은 초롱초롱하였다. 아쉬운 듯 서혁은 한마디 덧붙였다.
“이상은 그의 단편소설 '날개'에서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썼지.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은 주인공을 어디로 날게 하고 싶었을까? 바로 이상이 꿈꾸었던 4차원 방향으로 날기를 바랐을 거야.”

서혁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날은 어둑어둑했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그가 앞장서서 인도하였다. 구름다방으로 가는 것임이 분명하였다.
한참을 앞장서서 걷던 서혁은 나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5층 건물이었다. 그가 3층의 구름다방으로 올라가자고 말하였다. 그러고는 건물의 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불현듯 그가 아까 들려준 얘기가 떠올랐다. 서혁에게 물었다.
“이 건물의 동문이 어디 있지?”
“앞에 보이는 게 남문이니 오른 쪽으로 가면 돼. 왜?”
“그럼 들어가서 곧 서문 바깥에서 만나자.”
나는 동문으로 향했다. 서혁이 궁금한 듯 잠시 서서 바라보았다. 동문으로 건물에 들어가니 안에는 조명이 잘 돼서 환했고 두어 사람이 대리석 깔린 바닥을 총총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나는 동문에서 왼쪽으로 돌아 남문을 지났다. 오른쪽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리고 서문에 이르니 문 바깥에 서혁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건물 안에서 계속 걸어 북문을 지났고 다시 동문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더 걸어 남문을 지나 서문에 이른 뒤 바깥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서혁이 내게 말하였다.

“네가 뭐 했는지 나는 알아. 내가 말해준 대로 동문에서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반을 돌아 서문으로 나온 거지?”
그러면서 나를 상하좌우 훑어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 서혁이 내게 소리쳤다.
“네 가르마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갔구나!”
서혁의 말대로 내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뀌었나 보다. 그런데 가르마를 만져봤으나 여전히 왼쪽에 있는 것이었다. 내 표정을 읽은 서혁이 한마디 하였다.
“네 왼손도 오른쪽으로 옮겼으니 가르마를 만져보면 여전히 왼쪽에 있는 것 같을 수밖에.”

실감이 안 나던 나는 거리의 간판을 읽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글자가 좌우 뒤집어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인 것이었다. 읽기가 불편했다. 서혁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나는 건물 바깥을 돌아 동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반을 다시 돌아 서혁이 기다리고 있는 서문으로 나왔다. 그는 내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며 반겨주는 것이었다.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우리는 건물을 돌아 남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나서니 눈앞에 ‘구름다방’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은 문이 보였다. 서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는 조심스레 따라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니 구식 다방같이 내부 장식을 한 것이 우선 눈에 뜨였다. 다방 레지가 서혁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우리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레지가 가져온 커피는 이런 다방에서 흔히 마시던 다방커피가 아니고 원두커피였다. 진한 커피 맛을 음미하고 있던 중 우리 테이블에 한 사내가 동석하였다. 그 사내는 시인이었다. 여기서 시 한 편을 지었다며 한번 감상해보라는 것이었다. 그의 시는 정말 훌륭하였다.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니 그는 과찬이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곧 사라질 시이니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시를 짓고 감상해봅시다.”

문득 순원의 시가 생각났다. 순원의 조난 사고 뒷수습을 하고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오던 중 나는 그의 수첩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순원이 조난당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던 수첩을 분실한 것은 순원을 잃은 슬픔을 가중시켰다. 나의 표정을 본 서혁이 내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순원이 마지막 시를 적은 수첩을 내가 잃어버리다니….”
사내가 궁금해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해주었다.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내게 말하였다.
“그렇게 안타깝다면 한번 이렇게 해보시죠. 이 건물에는 신비스런 힘이 있다고 하니 남문 북문으로 건물의 둘레길을 돈 뒤에 좋은 생각을 떠올려보세요.”

저녁 시간이 지나 출출해진 우리는 다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이르니 서혁이 내게 말하였다.
“우리는 북문에서 기다릴 테니 둘레길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반 돌고 와보게나.”
나는 엘리베이터 맞은편의 남문으로 일단 건물을 나왔다. 뒤돌아서 건물을 보며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나서 다시 남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반을 돈 다음 북문으로 나갔다. 서혁과 사내가 궁금한 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양된 목소리로 서혁을 향해 말했다.
“지금 급히 가볼 데가 생겼네. 다음에 또 보세.”

사내에게도 인사를 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기차역 앞에서 버스를 내린 뒤 공중전화로 정태의 빵집에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그에게 두 시간 후에 찾아가겠다고 말하였다.
“자네 사진작가 청년에게 만들어줬다는 복잡 미묘한 매듭 점묘 도나쓰 있지. 그거 지금 당장 나를 위해 만들어주겠나?”
왜냐고 묻는 정태에게 대답도 않고 나는 수화기를 놓았다. 기차역을 향해 걸으며 구름다방 건물의 북문을 나서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건물의 신통한 힘을 느낀 순간이었다. 내게 한 가지 희망이 생긴 것이다.

정태의 빵집에 도착한 것은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빵집에 들어서며 나는 벽화의 아리안느와 액자 속의 아리안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태는 나를 보자 진열장 맨 위에 놓인 매듭 점묘 도나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막차 시간에 쫓겨서 그러니 며칠 뒤 자세한 얘기를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도나쓰 봉지를 들고 바삐 나왔다.

자정이 거의 다 돼서야 집에 도착하였다. 식탁 위에 도나쓰를 담은 접시를 놓았다. 도나쓰를 두 번 돌고 세 번 감는 일곱 가지 무지개색의 설탕 알갱이들. 그것은 아름답고 신비한 그림이었다. 나는 무지개색이 빙글빙글 감고 도는 줄을 계속 따라가며 보려고 애썼다. 도나쓰 뒤로 감아 돌 때는 머릿속에 그 줄을 입체적으로 상상하며 점묘화를 그려보았다. 나는 의식을 치르듯 도나쓰 앞에 앉아 있었다. 천천히 도나쓰를 입에 집어넣었다. 설탕 알갱이가 아사삭 씹혔다. 혀가 느낀 설탕의 달콤함이 알알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잠자리에 누웠다. 잠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눈 천지였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 산 속에서 나는 힘들게 걷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무언가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는 눈길만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갑자기 저 앞에 무슨 형체가 누워 있는 듯 보였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아, 순원을 불렀나 보다. 그 형체가 꿈틀거리더니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순원이었다. 갑자기 내 발이 눈밭에 얼어붙었다. 순원은 말없이 나에게 따라오라는 몸짓을 하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얼어붙은 발에 힘을 줘 간신히 눈밭에서 뗀 뒤 그를 따라 걸었다. 순원이 한참을 걸어나갔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다 보니 그는 앞으로 곧장 걷지 않고 조금씩 왼쪽으로 도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원에게 ‘너는 지금 왼쪽으로 조금씩 휘면서 걷고 있어. 앞으로 곧장 가야 돼’라고 외쳤다. 그러나 순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보다 못한 나는 순원의 앞에 나섰다. 그리고 그를 거의 끌다시피 앞으로 곧장 이끌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우리 앞에 어렴풋이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순원이 쉬던 나무였다. 쌓인 눈을 파보았다. 수첩이 나타났다. 순원이 수첩을 꺼낸 뒤 내게 펼쳐 보여주었다. 그의 시 '113'이 쓰여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그의 시를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외울 때까지 계속 읽었다.

새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방안이 훤했다. 아침이 된 것이다. 뒤숭숭했다. 기나긴 꿈을 꾼 듯했다.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순원의 꿈이었다. 꿈에서 순원을 만난 것이었다. 기뻤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이 아침까지 기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의 시 '113'을 암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펜을 들어 종이 위에 순원의 시를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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