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쌍관 II
-최재경-
II.
나의 둘째 친구 정태는 학창 시절 그림 그리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미술반에 들어갔고 교내 사생 대회에서는 자주 상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장래를 위해 법대에 들어갈 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고민 끝에 부모의 뜻에 따라 법대에 들어간 정태는 취미로 그림을 계속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법학 공부가 쉬운 게 아니었다. 억지로 법대를 졸업할 수는 있겠지만 평생 법조문만 읽으며 살 자신이 없었다. 결국 완강히 말리는
부모 뜻에 반하여 휴학원을 내고야 말았다. 한 해를 쉬며 그림 연습에 전념한 정태는 이듬해 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원하던 그림 그리기를 맘껏 할
수 있게 된 그는 매우 행복하였다. 이태 동안 미대에 다니던 정태는 보다 큰물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유학 준비를 시작하였다. 다음 해 불란서 한
지방 도시의 작은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불란서 미술학교에서 정태는 새로운 자극을 받으며 그림 그리기에 열중할 수 있었다. 파리에 있는 미술관들을 자주 방문하며 안목을 넓히기도 했다.
그러나 불어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정태는 첫해 매우 고생하였다. 그림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외국에서 색다른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
위안이 됐던 것은 불란서 음식이었다. 시내에 숨어 있는 비싸지 않은 레스토랑을 찾아내는 것은 즐거운 탐험 거리였다.
4년째부터 정태는 그림에 자신이 생겼다. 아직 자신만의 화풍을 세우기에는 갈 길이 멀었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열심히 해나가면 뭔가를 이룰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불어도 나름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니는 레스토랑 중에는 몇 군데에서 정태를 단골손님으로 맞아주는 곳도 생겼다.
학교로 30분간 걸어가는 등굣길 중간쯤에 그의 단골 카페가 있었다. 상업지역이 아닌 주거지역에 있는 카페여서 평소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고 수수한
곳이었다. 어느 날 주인이 정태의 테이블에 와서 앉는 것이었다. 몇 달 전엔가는 한번 정태의 스케치북을 주인이 보고 싶어 해서 그림 몇 가지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카페 주인이 참 잘 그렸다고 정태에게 말했었다. 그냥 인사차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정태는 느꼈었다. 이날 카페 주인은 정색을 하며
정태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카페의 네 벽에는 몇 개의 그림과 장식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주인은 이것을 세 벽으로 옮기고 정면의 큰 벽을 비워서
그곳에 벽화 그리는 것을 정태에게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제안을 듣고 정태는 기뻤다. 시골 도시의 평범하고 손님도 많지 않은 카페지만 드나드는
손님들이 한 번씩은 정태의 벽화에 눈길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파리에서 일주일 쉬고 돌아온 정태를 카페 주인은 반가이 맞아주었다. 며칠 전부터 카페 문을 닫은 주인은 정태에게 열쇠를 넘겨주고
지중해 연안으로 바캉스를 떠났다. 학교로 등교하던 정태는 이제 카페로 출근하게 되었다. 벽화는 경치 좋은 야외에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과일과 빵과
포도주가 있는 그림으로 이미 파리에서 구상하였다. 반은 풍경화고 반은 정물화인 셈이다.
작업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벽화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정태는 생각하였다. 배경 풍경을 상당 부분 그리고 나니 벌써 카페 주인이
돌아왔다. 그는 반쯤 그려진 벽화를 보고 좋다고 정태에게 말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정태는 카페 주인의 아내를 보았다. 아름답다고 속으로 느꼈다. 다음날
오전 작업을 하고 점심 식사 후 돌아온 정태가 오후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주인 아내가 커피와 디저트를 갖다 주었다. 디저트는 ‘를리지외즈’인데 눈사람같이
만든 조그만 빵에 크림과 초콜릿을 얹은 달콤한 것이었다. 정태는 커피와 디저트를 받으며 주인 아내의 검은 머리와 푸르스름한 눈을 바라보았다.
이튿날에 정태는 테이블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날도 주인 아내는 커피를 가져왔는데 디저트는 ‘에클레르’였다. 기다란 빵에 크림이 들어 있고 커피빛
설탕을 얹은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정태의 눈에 띄었다. 오후에는 테이블 위의 빵 등을 그렸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정태는 쉬면서 오늘 그린 것을
머릿속에 다시 그려보았다. 그리고 주인 아내가 갖다 줘서 먹은 에클레르를 생각하다 보니 그녀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벽화에 그녀를 그려 넣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생긴 것이다. 테이블에 그녀가 앉아 있으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살아날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정태는 카페 주인에게 부인의 그림을 벽화에 넣고 싶다고 말하였다. 벽화에 구체적인 자리를 가리키며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릴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잠시
생각하던 주인은 머리를 끄덕이곤 밝은 표정을 지으며 승낙하였다. 이날 오후에도 주인 아내는 나타났다. 커피와 ‘크렘 브륄레’를 가지고. 달콤한 크림 위에
불로 녹여 굳힌 설탕을 덮은 디저트이다. 정태는 그녀에게도 벽화에 그녀의 모습을 그려 넣고 싶다고 얘기하였다. 그녀는 정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곧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태는 당장 내일부터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카페에 출근하니 주인과 아내는 정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다가오더니 정태의 양 볼에 키스를 하였다. 가까운 불란서 사람들끼리 만날 때
하는 볼 키스였다. 셋이서 벽화에 그려진 대로 카페의 테이블을 옮겨 오고 그 위에 과일과 빵과 포도주를 놓았다. 그리고 주인 아내가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정태는 간단한 스케치를 시작하였다. 주인은 얼마간 옆에서 지켜보았다. 정태가 점심을 하고 돌아오니 주인 아내가 커피와 ‘플롱’이라는 구운 커스타드를
가져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정태와 마주 앉았다. 정태가 처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안느’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빵사였다. 카페에서 팔리는 빵과 디저트는 그녀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아리안느도 애초에는 화가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림을 배우던 중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는데 그가 카페를 차리게 되었다. 그때 결혼 생활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림을 멀리했다가 아예
제과제빵 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이다.
아리안느는 매우 협조적인 모델이 돼주었다. 그녀 자신이 그림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날따라 그녀가 입고 온 옷은 우아하였다. 매혹적인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와 우아한 옷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정태는 그 아름다움을 벽화에 옮기기 위해 신들린 작업을 계속하였다. 아리안느의 그림은 다음 날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카페 주인은 기다리다 먼저 가까이 있는 집에 들어갔고 아리안느와 정태만 카페 안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정태는 벽화 속의 아리안느와 마주 앉은
아리안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리안느와 눈이 마주쳤고 정태는 한참 그녀의 얼굴과 몸매와 옷을 눈에 담았다. 두 사람은 정적 속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정태는 일어나 일 마무리를 한 뒤 아리안느의 양 볼에 키스하고는 카페를 떠났다. 무심코 시내의 이 길 저 길을 걷다가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대부분 파장하여 어두운 거리를 그는 터벅터벅 걸었고 머리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정태는 소파에 주저앉아 멍하니 벽을 응시하였다.
그러자 천천히 아리안느의 얼굴이 벽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태를 쳐다보는 그 얼굴은 한참 동안 벽에 남아 있었다.
벽화를 완성하는 데 이틀이 더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 날 최종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오전에 카페로 출근하였다. 주인과 아리안느가 미소 띤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정태는 우선 벽화 주변을 정리하였다. 카페 주인이 봉투를 건네주었다. 적지 않은 작품 제작비였다. 아리안느가 커피와 오동통한 를리지외즈를 가져왔다.
정태와 그녀는 약속한 듯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지켜보던 주인이 부엌으로 사라졌다. 정태는 커피를 마시며 벽화와 아리안느를 번갈아 가며 응시하였다.
그리고 를리지외즈를 입안에 오래 두고 맛을 보았다. 정태를 지켜보던 아리안느가 입을 열었다.
“정태 씨 벽화가 맘에 들어요. 카페의 품격을 높여준다고나 할까요. 테이블 위의 빵은 실감나게 그렸군요. 먹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런데 정태 씨에게
한마디 충고해주고 싶어요. 제빵 학교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보는 게 어때요? 정태 씨에게 갖다 준 디저트는 내가 특별히 맛있게 만든
것인데 그것을 먹는 모습을 보니 정태 씨도 디저트와 빵에 대한 심미안을 쉽게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정태는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고는 아리안느를 보고 웃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정태는 서서히 일어섰다. 몇 마디 인사의 말을 아리안느에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양 볼에 키스를 하였다. 부엌에서 나오는 주인과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 일주일간 정태는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가슴속 깊이 뭔가 허전하였다. 소파에 앉으면 벽에 아리안느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고 정태도 거기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아리안느가 말을 하는 것 같아서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미술학교는 아직 1년의 과정이 남았고 마지막 가을 학기를 등록할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도통 붓을 들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벽화를 끝내고 열흘이 지난 날
정태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파리를 찾았다. 불란서에 처음 올 때 들렀던 몽마르트르 언덕에 모처럼 올라가 파리 시를 내려다보았다. 화가들이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뻔한 그림을 보자마자 곧 눈을 돌렸다. 그들이 관광객을 아무리 멋있게 그렸어도 정태의 눈길을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있던 몇 군데의 빵집이 더 정태의 눈길을 끌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낸 정태는 미술학교는 4년 다닌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아리안느가 충고한 대로 제빵 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하였다. 빵과
디저트 만드는 법을 꼭 배우고 싶었다.
제빵 학교에서 5개월간의 정식 코스를 밟고 정태는 귀국하였다. 그리고 고향에서 조그마한 빵집을 차렸다. 그는 빵집 정면의 벽에 벽화를 그리기로 작정하였다. 바로
아리안느의 카페 벽화와 같은 그림을.
처음에는 가까스로 현상 유지만 하였다. 그러나 빵 만드는 것은 그림 그리기와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아리안느가 정태를 제대로 파악했던 것인가? 어렵게
첫 2년을 보낸 정태의 빵집에 손님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였다. 맛있으며 색다르기도 한 그의 빵들을 사람들이 좋아하였다. 정태의 빵집을 사람들은 벽화 빵집이라고
불렀다. 정태가 빵을 색다르게 만드는 것는 그의 화가 경험 때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맛뿐 아니라 빵의 모양과 색깔에도 그는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 때문인지
정태의 빵을 사러 먼 곳에서도 오는 손님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정태의 다양한 빵처럼 다양한 손님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정태가 만든 다양한 빵 중 도나쓰가 있다. 정태는 이 도나쓰 표면을 무지갯빛 설탕 알갱이들로 아름답게 뒤덮는다. 도나쓰에 일곱 가지 색으로 점묘화를 그리는 것이다.
한번은 일곱 가지 색의 설탕 알갱이들을 일렬로 도나쓰 표면에다 동그랗게 뿌려본 적이 있었다. 도나쓰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도나쓰의 가운데
구멍을 동그랗게 한 바퀴 도는 방법과, 도나쓰의 구멍에 검지를 넣고 엄지와 검지로 도나쓰를 감듯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으로 무지갯빛의 동그라미를 그린 도나쓰를 가끔 퇴근길에 빵을 사러 오던 30대 후반의 남자에게 팔았다. 그 도나쓰를 꼭 아내에게 주라는 말을 하며. 그 부부는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정태는 알고 있었다. 둘째 방법으로 고리를 감아 도는 무지개를 그린 도나쓰는 한 노처녀에게 팔았다. 그녀의
애인에게 최근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우울한 소식을 정태는 그녀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정태는 첫째, 둘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도나쓰를 감아 도는 수가 없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신기하게도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정태는 더 복잡 미묘한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은 첫째 방법으로 두 번 돌면서 둘째 방법으로 세 번 감는 것이었다. 즉 도나쓰의 가운데 구멍을 두 바퀴 도는 동안, 먹는 부분을 세 번 감는
방법(엄지와 검지로 감는 것을 세 번 하는 방법)이었다. 일곱 가지 색의 설탕 알갱이들로 이 방법을 따라 도나쓰 위에 점묘화를 그리고 보니 그 아름다움에 정태는
황홀해지기까지 했다.
이 복잡 미묘한 점묘화의 도나쓰를 누구에게 팔까 정태는 한참을 생각하였다. 고민하던 그에게 한 30대 초반의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눈이 깊이 패인 청년인데 정태의
빵집에 오면 자주 커피와 디저트를 들며 테이블에 앉아 벽화를 오래 쳐다보곤 하였다. 그가 사진작가여서 그러려니 했다. 한번은 그 청년이 정태에게 벽화 속의
아리안느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정태는 벽화에 얽힌 사연을 짧게 얘기해주었다. 어느 날 오후에도 그 청년은 오랫동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정태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한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가 깊이 사모했던 여자 이야기였다. 그가 아홉 살이던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고향의 부잣집 잔치에 갔었다. 그는 거기서 주인집의 여덟 살 난 딸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그 소녀에게 매혹되었다. 그 이후 25년간 그는 소녀를 아무도 모르게
사모하였다. 처음 본 지 9년이 지났을 때 그는 그녀를 딱 한 번 보았다. 고향에서 다리를 건너다가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하며 지나가는 그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4년 후 그녀는 결국 한 남자와 결혼하였고 3년 뒤 그만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것이 9년 전인데 그 청년은 여전히 그녀를 살아 있을 때처럼 사모해오고 있었다. 그
청년의 말로는 아리안느가 그녀와 상당히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꿈에서만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정태에게 조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태는 그 청년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 복잡 미묘한 점묘화의 도나쓰가 상할까 봐 매일 만들었다. 꼭 하나씩만. 어느 날 그 청년이 나타났다. 정태는 그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벽화를 감상하는 때를 기다렸다가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오늘 만든 그 도나쓰를 보여주었다. 청년은 매우 신기해하였다. 정태는 도나쓰를 청년에게
그냥 주었다. 청년의 깊숙한 눈은 정태를 한참 바라보았다.
세 가지의 색다른 도나쓰를 먹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떤 이야기를 해줄지 정태는 매우 궁금하였다. 그런데 첫째 방법으로 만든 도나쓰를 아내에게 주었을 30대 후반의
남자는 그후 몇 번 찾아왔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들은 얘기는 요즘 민간요법으로 애를 가질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처녀도 몇 번 왔었는데 여전히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느 날 빵집 문을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문 여는 소리가 빵집의 정적을 깼다. 정태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니 사진작가 청년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빵 몇 개를 사더니 자기가 주로 앉던 테이블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정태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청년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지난번에 당신이 만들어주신 점묘화 같은 도나쓰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사모하던 여자를 꿈에서 만난 것입니다.
꿈에서 그녀를 보고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녀 생전에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꿈에서 그녀는 앞장서서 나를 인도하였습니다. 풍광이 아름답고 매우 평화로운 천국 같은 곳이었죠. 그녀가 나를 처음 인도한 곳은 우리가 처음 만난 그녀의 집이었습니다.
마침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죠. 그녀는 내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의 매혹적인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인도한 곳은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던 고향의
그 다리였어요. 그녀는 친구들과 얘기하는 도중에 황홀해하는 나에게 잔잔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어요. 그러더니 나를 어떤 거리로 인도하였죠. 그곳은 내 눈에 익은 거리인데
얼마 동안 걷다가 그녀가 한 카페 앞에서 서는 것이었어요. 그 카페도 언제 본 듯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카페 안에 같이 들어가다가 나는 그만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나는 정신이 멍했습니다. 그 황홀한 꿈을 되새기고 되새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했죠.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고향의
그 카페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녀가 꿈속에서 인도했던 거리를 쉽게 찾았죠. 그리고 그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내 그 카페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카페의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익숙한 광경이 내 눈에 뜨이는 것이 아닙니까. 카페의 정면 벽에는 당신 카페의 저 벽화와 똑같은 그림 절반이 그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신과 매우 비슷한 사람이 모델을 테이블에 앉혀놓고 벽화를 그리고 있지 않겠어요? 나는 부리나케 카메라를 꺼내 그 뜻밖의 장면을 여러 번 찍었답니다. 하도 신기해서
나는 그다음 날에도 그 카페를 찾아갔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혀 찾아낼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사진을 인화해봤죠. 사진은 잘
나왔습니다. 한 사진은 제가 크게 확대해서 여기 액자를 만들어 왔어요.”
사진작가 청년은 옆에 세워둔 비닐봉투에서 액자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액자의 사진을 보고 정태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바로 정태가 아리안느를 벽화에 그리고 있는
사진이 아닌가. 3년 전 불란서 카페 바로 그곳에서.
정태는 청년이 남기고 간 그 사진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밤늦게까지….
그날 이후 벽화 빵집의 한 벽에는 사진작가 청년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빵집에 온 손님들은 무심코 벽화와 액자에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나는 수학자 서혁에게 정태의 도나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대뜸 순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철사의 양끝을 이으면 닫힌 곡선이 돼. 이 곡선은 동그랗게 원으로 만들 수 있지. 철사의 머리와 꼬리가 이어졌으니 수미쌍관(首尾雙關)이 아닌가. 순원의 링반데룽은
수미쌍관이 불운한 방향으로 흐른 것이네.
도나쓰는 어떤가? 여기서는 두 가지의 수미쌍관을 볼 수 있네. 도나쓰의 표면은 2차원이지. 책상 위를 고무 장판으로 덮었다고 생각해봐. 이 장판도 2차원이야. 그래서
장판에는 두 방향의 철사가 있다고 볼 수 있어. 수평 방향의 철사와 수직 방향의 철사. 자, 이제 이 장판의 왼쪽 변을 오른쪽 변에 갖다 붙이자. 그러면 원통 모양의 장판이
되지. 이제는 장판을 밀가루 반죽처럼 쉽게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위의 원을 아래 원에 갖다 붙일 수 있지. 그럼 장판이 어떤 모양이 되지?”
“도나쓰 모양이 아닌가?”

“맞아, 아주 큰 도나쓰 형태이지. 우리가 고무 장판을 도나쓰 모양으로 만들 때 평행한 변끼리 두 번 갖다 붙이지 않았나? 좌우 변끼리 붙인 다음 상하 변끼리 붙였지.
그래서 도나쓰에 두 번의 수미쌍관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야. 그건 그렇고, 정태는 복잡 미묘한 점묘화를 어떻게 만들었지? 도나쓰의 가운데 구멍을 에워싸며 무지갯빛
설탕 알갱이들이 두 바퀴 도는 동안 도나쓰의 먹는 부분을 세 번 감아서 만들었어. 이제 도나쓰를 다 먹고 빨간색 설탕 알갱이 곡선만 고스란히 남겼다고 생각해봐. 그
곡선을 수학자들은 매듭이라고 불러. 왜냐면 그 빨간 곡선은 아무리 유연하게 늘여서 움직여도 원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야. 원으로 만들려면 빨간 곡선을 끊어서 동그랗게
푼 다음 끊었던 곳을 다시 이어야 돼. 이 매듭은 도나쓰 위에 만들 수 있는 무한 가지 매듭 중에서 가장 간단한 거야. 무지개색 설탕 알갱이들이 모두 이런 신비한 매듭을
이뤘기 때문에 아마도 그 사진작가 청년에게 영험한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꿈에서 사모했던 여자를 만나고, 또 시공을 초월해서 과거의 사진도 찍어 오고 말이야.

그런데 정태에게 이 얘기를 해줘야겠어. 빨간색 설탕 알갱이가 도나쓰의 가운데 구멍을 에워싸며 돌고 동시에 도나쓰의 먹는 부분을 감는다고 생각해보세. 이때 먹는 부분을
감는 속도가 가운데 구멍을 도는 속도의 무리수 배(倍)가 된다고 가정하지. 예를 들어 √2 같은 수, 즉 두 자연수의 비(比), q/p 같은 유리수가 아닌 수라고 하지. 그러면
기이하게도 빨간 설탕 알갱이의 곡선은 닫힌곡선이 되지 못해. 그 곡선은 영원히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저 무한히 열린 곡선이 돼서 도나쓰를 한없이 덮을 뿐이야.
수미쌍관이 안 되는 것이지. 정태가 이런 도나쓰를 만들면 내가 제일 먼저 먹어보고 싶네. 이것은 진시황의 불로초와 같은 것이 될 거야. 이 도나쓰를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될 거야.”
계속 (수미쌍관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