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수학 첫걸음 (Fred H. Croom 저, 한빛 아카데미, 2023) 한국어판 감수자 머릿말
고등과학원 수학부 김상현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함에 있다. - 게오르그 칸토어 (1845-1918)
수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많은 학생에게 있어서, 아마도 위상수학 과목은 첫번째 만나는 추상성 훈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이전에 듣는 많은 과목, 예를 들어 선형대수학이나 복소해석학에서 학생은 수(number)라는 분명한 대상의 성질을 다루게 된다. 조금더 추상적인 고차원 미분기하학을 공부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학생은 공간 안의 거리에 대한 많은 수학적 계산을 해 보면서 주어진 수학적 구조의 실체를 체감해 가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위상수학 과목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수, 거리, 모양도 없는 위상공간에 아주 제한된 몇 개의 공리만을 이렇게저렇게 조합하여서 수많은 결과를 얻어내고 있다. 유클리드 역시 그의 책 원론에서 다섯 개의 공리만을 조합하여 많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 책에서는 점, 선, 면과 같은 직관적인 대상을 다루었고,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반면 위상수학의 공리들은 생소하고, 우리의 손을 꽉 묶어 아주 제한된 방향으로만 움직이게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위상공간의 많은 결과들은 그 형태를 머리에 떠올리기 어려운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에까지 적용된다. 그러한 공간은 직선일 수도 있고, 무한차원일 수도 있고, 함수들의 집합일 수도 있고, 어떤 때에는 공간들로 이루어진 공간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결과를 어떻게 체감하여야 습득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이 그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새로운 개념이 있다면, 그 개념이 적용되는 간단하면서도 그 특성을 잘 잡아내는 그림을 매번 노트에 그려 보는 것이다. 물론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완벽하진 않지만,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그림의 제법 괜챦은 그림자가 될 수 있다.
수학을 공부하는 과정은 그림이나 악기를 배우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풀이를 단 한번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손으로 연습해보고 여러가지 변형을 혼자 풀어보면서 이 정의는 왜 (거의) 필연적으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 정리는 얼마나 강력한지 체득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붓과 악기를 자주 잡아야만 실력이 늘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런 마음의 그림을 전달하고자 하고 있다. 논리학적으로 필수적인 정의와 정리만을 담았다면 그 길이가 반의반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논리적으로는 굳이 필요 없는 많은 예제와 연습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칸토어, 하우스도르프, 푸앵카레와 같은 수학적 거인들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숨막히게 아름다운 바로 그 그림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연습을 통하여 독자가 위상수학의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릴 수 있게 된다면, 이제 위상수학의 공리들은 독자의 손을 묶는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을 허락하는 물감과 악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