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지식의 '쓸모 있음'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을 축하하며-

아인슈타인과 괴델은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와 수학자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창시하였고, 괴델은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음을 보였다. 이 두 과학자는 나찌의 박해를 피해 각각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IAS)가 바로 이들이 정착한 곳이다. 아인슈타인은 그곳에서 퇴근 때 괴델과 함께 걷기 위해 일한다고 말 할 정도로 둘은 가까왔다. 고등연구소는 뉴저지 주의 백화점 부호 뱀버거 남매가 기부한 5백만불을 기금으로 1930년 창립되었다. 이 기금은 남매가 월스트리트 대폭락 몇 주 전에 백화점을 팔아 확보한 현금의 일부였다. 그야말로 고등연구소는 천운으로 탄생했던 연구소인 셈이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첫 소장은 플렉스너였다. 그는 애초 치과대학을 만들고자 했던 뱀버거 남매를 설득하여 대신 기초학문의 고등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에게는 또 코닥 필름으로 백만장자가 된 이스트맨과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스트맨이 자기의 막대한 재산을 유용한 분야의 교육을 위해 기부할 작정이라고 말하자, 플렉스너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유용한 과학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스트맨의 즉답은 “사상 최초로 무선통신을 실용화한 마르코니 아닌가요?”였다. 그러자 플렉스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스트맨을 놀라게 하였다. “무선통신기와 라디오가 제아무리 쓸모가 많더라도 이에 관한 마르코니의 공헌은 하찮기만 합니다. 무선통신의 공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전자기파의 이론을 정립한 맥스웰과 전자기파를 발견한 헤르츠입니다. 맥스웰과 헤르츠는 연구의 효용성에 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죠. 애초에 실용적인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쓸모없는 이론을 마르코니가 기발하게 응용하여 효용가치가 엄청난 통신장비를 만들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가 발명한 검파기는 얼마 안 가서 사라졌어요. 돌이켜 보면 맥스웰과 헤르츠는 쓸모에는 무관심한 천재였고, 마르코니는 쓸모에만 관심있는 현명한 발명가였지요. 과연 누가 더 쓸모있는 일을 했을까요? 바로 맥스웰과 헤르츠입니다.”

플렉스너는 이스트맨에게 덧붙이길, 과학사에서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유익했던 위대한 발견들은 유용성을 추구하다가 얻은 게 아니고, 오히려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다가 뜻밖에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호기심에서 하는 연구의 결과는 대부분 쓸모로 직결되지 않는다. 그래도 대학과 연구소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연구를 적극 장려해야 하며, 연구자들에게 자유로운 소요(逍遙)의 분위기를 제공해야 한다. 눈앞의 응용에서 초연한 연구일수록 종국에는 인류의 행복에 공헌하며 인간의 지적 호기심도 충족시키게 된다.

호기심에 기반한 연구가 위대한 이론을 탄생시키고, 유용한 도구를 발명케 한 경우를 또 얘기해 보자.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에는 다섯 개의 공리가 있다. 공리란 워낙 자명하여 증명할 필요가 없는 진리를 말한다. 모든 명제들은 공리를 이용하여 증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참이 된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섯째 공리는 평행선 공리라고도 불리는데 ‘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명제이다. 평행선 공리는 다른 네 공리보다 복잡하여 어쩌면 나머지 공리를 써서 증명할 수 있는 정리일지 모른다고 사람들은 추측하였다. 그리하여 2천년간 많은 사람들이 증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마침내 19세기 초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헝가리의 보여이와 러시아의 로바쳅스키에 의하여 창조적으로 증명되었다. 즉 평행선 공리를 부정하여도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증명하였다. 다시 얘기하면 평행선이 없는 공간도 있고 평행선이 무한개 있는 공간도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런 공간을 비유클리드 공간이라고 부른다. 독일의 수학자 리만은 이런 공간을 더욱 일반화 하여 리만 기하학을 완성하였다. 그 60년 후 리만 기하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기초가 되었고, 이로부터 인류는 수성의 근일점 이동, 스펙트럼의 적색편이, 중력에 의한 공간의 휨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공간의 이상한 현상들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론적 쓸모는 뜻밖에 실용적 쓸모로 진화하였다. GPS 가 탄생한 것이다. 현대 생활에서 꼭 필요한 GPS는 일반상대성 이론과 특수상대성 이론을 써서 시간을 수정하지 않으면 단 2분만에 허용오차한도를 초과하게 된다. 이리하여 인류의 평행선 공리에 대한 호기심은 2천년간 숙성한 끝에 위대한 두 이론을 탄생시켰고(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일반상대성 이론), 일상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위성항법장치를 등장시켰다. 이렇듯 기초과학은 수십 년, 수백 년 후 어떻게 응용될지도 모르는 채 단순한 호기심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과 공동연구를 했던 물리학자 인펠트가 말하길 “고등연구소는 손을 뻗으면 어디서나 새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는 곳이다”라고 다소 로맨틱하게 얘기하였다. 이와 같이 고등연구소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한국인 중에 정근모 박사가 있었다. 그는 박사후과정을 프린스턴 대학의 플라즈마 연구소에서 밟고 있었는데 고등연구소에서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와 수학자 권경환 박사를 만나며 정례 물리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그는 차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만의 독특한 세계 최고의 연구분위기를 선망하게 되었다. 30년 후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게 된 정근모 박사는 우리나라에 고등연구소 같은 연구소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인 필립 그리피스 박사를 초빙했다. 수학자인 그리피스 소장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모방에서 창조로 발전하려면 고등연구소가 꼭 필요하며 지금이 적기라고 평가했다. 확신을 갖게 된 정근모 박사는 1996년 고등과학원(KIAS)을 설립하였다.

이번에 한국에는 큰 경사가 있었다. 허준이 교수가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받았다. 그는 유학 중인 부모 아래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허준이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6년간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베블렌 펠로우 등 방문교수로 재직하였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고등과학원을 6년간 KIAS 스칼라로 방문하였고 올해에는 고등과학원의 석학교수로 임용되었다. 필자는 허준이 교수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와 한국 고등과학원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그의 수학이 크게 성장하였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에 기반한 연구를 장려하는 두 기관(프린스턴 대학과 고등과학원)에서 수행하는 연구가 그의 미래에도 더욱 빛나는 결실을 맺을 것이라 기대한다. 허준이 교수는 어린 중고등학교 시절 시에 푹 빠졌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시를 쓴다고 학교도 자퇴하였고 결국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하였다. 재미있게도 독일의 수학자 바이어슈트라스가 말했다. “실로 뭔가 시인 다운 어떤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지 않은 수학자는 결코 완벽한 수학자는 아니리라.” 논리를 엮어 만든 아름다움이 수학이고, 언어를 꿰어 만든 아름다움이 시가 아닌가. 필즈상을 받고 시도 좋아하는 허준이 교수는 그야말로 진정한 수학자이다.

올해로 개원 26주년을 맞은 고등과학원은 한국에서 호기심의 최전선이다. 고등과학원의 모토는 ‘불가능을 상상하라(Imgine the Impossible)’이다. 고등과학원의 세 학부(수학부, 물리학부, 계산과학부)의 교수와 연구원들은 오늘도 불가능을 상상하고는 손을 뻗으며 새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있다. 이제는 한국의 과학기술이 모방의 단계에서 창조의 단계로 이미 접어들었다고 확신한다. 머지않아 제2의 필즈상 수상자와 노벨상 수상자도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한국의 국운이 바야흐로 상승하고 있다.

2022년 7월


조선일보 기사 (2022년 7월 7일, 인터넷판)


조선일보 기사 (2022년 7월 7일, 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