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쌍관


나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 그들의 이름은 순원, 정태, 서혁이다. 순원은 시인이고, 정태는 제빵사이며 서혁은 수학자이다. 이들은 각자 다양한 체험을 하였다. 순원은 시인이면서 소설을 쓰고 영화제작에도 참여하였다. 정태는 원래 화가가 되려고 했으나 결국 제빵사가 됐다. 서혁은 소설과 시 읽기를 좋아하는 수학자이다. 여기서 나는 이 세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아니, 이 친구들로 하여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게끔 해보려고 한다.

I. 순원은 애초부터 시인을 꿈꾼 것은 아니다. 그는 학창시절 단편소설을 썼다. 신춘문예에 여러 번 응모도 하였다. 그러나 매번 미끄러지기만 하였다. 그것도 최종심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낙담한 그는 결국 시로 전향을 하였고, 힘들게 쓴 시를 들고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던 순원은 어렵사리 등단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의기양양하던 그는 나에게 등단주를 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와 술잔을 나누며 진심으로 그의 등단을 축하해 주었다. 그때 순원이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한 작가가 말하기를 시인이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순원은 신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어서 시를 쓴 것인지 아직 확신이 안 선다는 것이었다.

등단 이후 활발하게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던 순원은 어느 날 내게 단편소설 한 편을 읽어보라며 가져왔다. 시를 쓰다가 힘들어서 지지부진하던 중 옛날에 구상했던 것으로 최근에 다시 써본 작품이라는 것이다. 읽어보니 예전 습작시절 그의 작품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 단편이었다. 그 후로도 순원은 몇 편의 단편소설을 써서 내게 보여주었다. 괜찮은 수준의 작품들이긴 했으나 그는 발표지면을 찾지 못했다. 한동안 뜸하던 순원은 그 단편소설들을 시나리오로 개작하였다. 그리고 영화인들을 접촉하며 자기의 시나리오를 단편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한번은 순원이 연락해와 오랜만에 시내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다. 그런 뒤 둘이 자주 들르던 술집에 가서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치열한 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시와 소설쓰기, 그리고 영화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술잔이 여러 번 오가며 서로 나누는 말들이 거침이 없을 때쯤 순원이 한마디 하였다.
“예술작품에 너무 많은 기술이 쓰이면 지루한 작품이 되고 말아. 시 쓰는 요령만 터득해서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지. 누가 말했듯이 시인에게는 모름지기 이 세상의 비밀스런 떨림을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이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하지만 시적 재주만으로 버티는 시인이 하고 많은 게 현실이지”

처음 순원이 소설을 쓸 당시 그는 술을 좋아하긴 해도 과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인이 되면서부터 그는 술을 많이 마셨다. 과음할 때는 그야말로 필름이 끊어지곤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도 순원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놓더니 기어코 과음을 하였다. 결국 몸을 주체 못하는 그를 내가 집까지 바래다 주어야 했다.

며칠 후 순원을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깊은 눈을 한곳에 응시하며 독백하듯 내게 말하였다.
“한 작가가 말했다지.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라고.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나서 다음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행위라고 말이야. 맞는 말이고 말고.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과음하고 나면 종종 필름이 끊어져. 그런데 요즘 들어서 단편영화제작 일을 하다 보면 편집하는 중 필름을 서로 잇는 작업을 자주 하게 되지. 시를 지으며 필름이 끊어지고 영화제작하며 필름을 다시 잇곤 하지. 재미있지 않은가?”
순원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며 말을 계속하였다.
“최근까지 나는 시를 완성할 때마다 시의 제목을 짓는데 각별히 신경을 썼었지. 절제된 언어로 압축된 한편의 시를 쓴 뒤 그 시를 함축하는 제목을 짓는 것은 시의 시를 쓰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자네 말이야, 내가 요즘 시의 제목을 어떻게 짓는 줄 아는가? 등단 후 지난 달까지 나는 아흔 일곱 편의 시를 짓고 그 제목을 일일이 정했었지. 그런데 이제는 시의 제목이 98, 99, 100,… 이라네.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고 있지. 왜냐고 묻지는 말게나. 시를 쓰고 나서 다음 순서의 수를 제목으로 붙이고 나면 어느덧 그 숫자에 시의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는 느낌이 드네. 내가 수학적으로 시를 쓰려는 것은 아닐세. 오히려 숫자에 시를 담고 싶을 뿐이네. 모든 숫자에 시를 헌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하고 순원은 볼일이 있다며 훌쩍 나갔다. 나는 카페에 혼자 남아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필름을 끊고 또 필름을 잇는다는 그의 말을…. 아울러 하나씩 늘어나는 시의 제목 숫자를 떠올려보았다. 어쩌면 그다운 일인지도 몰랐다.

몇 달이 흘렀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단편영화 작업이 최근에야 끝났다고 그는 전하였다. 오랜 기간 과로한 뒤라서 쉬고 있는 중이라던 그는 기분전환 겸 등산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며 나에게 3박4일 백두대간 등반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나 11월 중순이니 산속은 이미 겨울일 것이다. 순원의 말은 짧았다. 내가 안 가면 자기 혼자라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원과 함께 백두대간 등반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며칠 뒤 아침 일찍 우리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날이 쌀쌀했고 하늘은 찌뿌둥했다. 창 밖의 경치를 보며 그와 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중간 지점쯤에 이르렀을 때 서로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순원은 그간 영화제작으로 바쁘긴 했지만 시 쓰기를 등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마지막 시의 제목은 뭐지?”
“112”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 시는 어떤 시일까? 무표정한 순원의 얼굴 뒤로 차창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등산로 입구의 절에서 대웅전과 오래된 석탑을 둘러본 뒤 순원과 나는 좁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이미 낙엽이 져서 앙상한 가지만 드러냈고 계곡의 물가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첫날의 목표지점을 반쯤 남겼을 때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내리는 눈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날이 어두워질 때쯤 야영지에 도착한 뒤 텐트를 서둘러 치고 저녁밥을 지어먹었다. 순원과 나는 텐트 안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둘째 날 아침 우리는 텐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온 천지에 쌓인 하얀 눈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적어도 5 센티미터는 내린 것 같았다. 쌓인 눈을 끓여 아침을 차려먹고 우리는 이날의 목표인 정상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계속 내리던 눈은 오후쯤 멈췄다. 눈으로 막히던 시야가 트이니까 장관의 경치가 펼쳐졌다. 눈이 수북이 쌓인 나무들의 모습은 태고적 신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순원과 나는 오랫동안 말없이 정상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한 시간 너머 흐른 뒤 정상에서 내려와 산등성이에 텐트를 치고 둘째 날 밤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순원과 나는 눈을 끓여 만든 차를 마시며 오늘 눈에 담아두었던 정상 주변의 경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순원이 갑자기 무엇을 쓰겠다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순원이 나왔다.
“오늘 산행 중 떠오른 시상으로 시를 썼네.”
“그래? 제목은 113이겠군.”
그는 말을 이었다.
“113은 소수(素數)이지. 자신과 1로만 나누어지는 수란 말일세.”
갑작스런 수학얘기에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113은 특이한 소수야. 그 순서를 뒤바꿔 만든 수 131과 311도 역시 소수란 말이야. 같은 성질을 가진 수는 199가 있지. 그런데 내 예상으로는 그 이상 없는 것 같아.”
복잡해진 순원의 수학얘기에 나는 잠자코 있다가 대꾸하였다.
“그러면 오늘의 시 113은 매우 멋진 시일지도 모르겠구만. 이 자리에서 한번 읊어보게나.”
“내일 정리한 뒤 읽어주겠네.”
순원과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꾸 몸을 뒤척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10 센티미터나 쌓여있었다. 오늘 목표는 둘째 봉우리에 오르는 것인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우리는 발길을 서둘렀다. 정상과 둘째 봉우리 사이는 꽤 평평한 고원지대였다. 깊은 산속에 특이하게 형성돼 색다른 등산체험을 할 수 있어서 평소에는 인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폭설로 인해 일찍 하산들을 했는지 등산객은 보이지 않았다. 순원과 나는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힘들게 걸었다. 걷는 도중 외딴 곳에 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거기서 준비해온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잠시 쉬는 동안 나는 순원이 그의 수첩을 꺼내서 펜으로 몇 자 적는 것을 보았다. 순원을 재촉하며 둘째 봉우리로 향해 내가 앞장서 나아갔다.

오후 들어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깊은 눈길을 헤치며 걷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눈발에 가려 시야는 10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세 시간 후 눈은 멈췄지만 목표지점은 아직 먼 곳에 있었고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했다. 결국 우리는 목표는 포기하고 우선 근처에서 오늘 밤을 지낸 뒤 내일 아침에 하산하기로 결정하였다.

근처 아늑한 곳에 텐트를 친 뒤 우리는 마지막 저녁식사로 준비해온 쇠고기 김치찌개를 끓였다. 순원과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급급해 별 이야기도 안 했다. 해가 아직 지지 않아 사방은 훤했다. 차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순원이 갑자기 무엇을 찾더니 심난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어젯밤에 시를 쓴 수첩을 오는 길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한 시간쯤 전에 잠깐 쉬던 나무 밑 자리에 떨어뜨린 것 같다고 말하며 그것을 찾으러 다녀오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곧 해도 질 텐데 공연히 위험한 일 자초하지 말아. 어제의 시상을 되살려 그 시를 다시 쓰면 되잖아.”
내가 달래도 순원은 막무가내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겠다며 우리가 걸어온 길을 급히 거슬러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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