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FORD 첫 달의 정착 일지

2002년 8월 1일: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다.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왔던 일년간의 안식년이 바야흐로 시작되다. 미국생활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귀국하던 때가 아마득한 12년 전의 일이다. 동경을 들러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 세관신고서에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신고했으나 세관원이 짐 속에서 반찬거리를 발견해내 곤혹해짐. 그들이 먹을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허위신고를 문제삼았다. 결국 무사통과. 공항에서 렌트카를 빌려 학교 안의 아파트에 도착하다. 반년 전에 신청해두었던 아파트인데 시설이 괜찮고 수학과에서 가까워 편리한 곳이다. 그러나 unfurnished이어서 우리가 모든 가구를 장만해야된다. 가까운 은행에 가서 새 계좌를 개설하다. 그리고 우선 급히 필요한 램프를 구입하다. 밤에 아래층 사람이 우리의 발자국소리가 크다고 천장을 쿵쿵 친다. 드디어 미국에 온 것이다.

8월 2일: 가까운 DMV에 가서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다. 필기시험에서 4문제를 틀렸으나 3문제까지만 합격이란다. 몹시 낙담한 나의 표정을 본 채점직원이 그냥 합격시켜주어 다행히 난국을 타개하다. Stanford 대학교 수학과에 찾아가서 나를 초청한 Rick Schoen 교수를 반가이 만나다. 임시로 Leon Simon의 연구실을 배정 받다. 아파트에 전화가 개통됨.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파트 구하는 문제 다음으로 중요한 승용차를 구입하기 위해 신문의 광고 난에서 여러 가지 차의 광고를 읽어보다. 그러나 어느 차를 사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3일(土): 어제 본 차 광고 난에서 고른 두 군데에 전화해보았으나 마땅치 않음. 차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동생이 나서는 게 석연치 않다. 집에서 먼 한국 식료품점에 들러 장을 보다. 여기에 없는 게 없어 굳이 한국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다. Rick의 집에서 두 가족이 저녁식사. 20년 동안 접촉한 가족이어서 서로의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잘 아는 사이다. Rick이 지역 주간지의 광고난에서 내일 있을 garage sale 몇 군데를 골라주다. 그 집 정원의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오다.













4일(日): Garage sale은 미국사람들이 쓰던 것 중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을 자기 집에서 파는 일종의 벼룩세일이다. 지역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집에 찾아와 염가로 구입해간다. 여기서 좋은 물건을 사려면 아침 일찍 남보다 먼저 찾아가야 한다.나는 운 좋게도 첫날인 오늘 처음 찾아간 garage sale에서 내게 꼭 필요한 소파를 발견할 수 있었다. 2인용 love sofa와 두 개의 안락의자를 염가에 구입하다. 차를 구입하는 문제에 있어선 그동안 고집해왔던 특정 모델을 포기하고, 대신 보다 경제적인 일제 차를 구입하기로 마음먹다. 차 수리비로 많은 돈을 지불했던 쓰라린 경험 때문이다. 신문광고 난에서 여러 가지를 검토한 끝에 Honda Civic을 선택하고, 그 주인에게 전화하여 만날 약속을 하다. 며칠 후 동부로 이사를 가야할 그녀는 그간 차 파는 문제로 고심한 듯하다. 실제 차를 본 아내는 내키지 않아 하였으나 그런 대로 쓸만한 차인 것 같아서 약간을 흥정한 뒤 구매계약을 하다. 차 문제로 오래 고민하고싶지 않아서이다. Stanford 대학에 근무하다가 이번에 서울대로 옮겨가는 김영훈 선생이 저녁에 찾아오다. 그 아내는 Leon Simon의 제자였는데 UC Santa Cruz에 직장을 구하였단다. 고맙게도 김영훈 선생에게서 자전거, TV, 밥솥 등을 물려받다.

5일: 기섭이(둘째 아이)의 고등학교 입학절차를 밟고 그의 책상과 의자도 구입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어렸을 때의 예방접종기록을 요구해서 한국에서 뒤늦게 그것을 가져오느라 어려움을 겪다. 그리고 우리가 잘 일본식 침구 futon을 구입하다.











6일: 식탁을 좀더 편한 것으로 격상시키다. Michael Friedman의 talk을 듣다. 그는 내 학위논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다. 그도 많이 늙다.

7일: 내게 오는 이메일을 한글로 읽기 시작하다.

8일: 그동안 쓰던 렌트카를 반환하고, 나흘전 구입한 차를 인도 받다. 쓰는 차가 격하된 셈이다. 새 연구실을 배정받다. 40년 이상 Stanford에 근무하다 오래 전 은퇴한 Sunseri 교수의 연구실인데 그녀는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내가 혼자 쓰게된다. Rick과 캠퍼스 안의 Lagunita 호숫가에서 조깅을 하다. 물이 마른 삭막한 호수라 며칠 전까지 뛰던 물 많은 관악산 계곡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9일: 몇 군데의 차 보험회사에 들러봤으나 보험료가 매우 비싸다. 전에도 가입한 적이 있는 State Farm에서 한국에서의 무사고 기록을 인정받아 비교적 저렴하게 보험신청을 하다. 한국에서 가져간 노트북 컴퓨터에 모뎀을 연결하여 오늘부터 인터넷에 접속하다. 그러나 접속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10일(土): Garage sale에 갔다가 허탕친 뒤, 가족과 버스, 지하철을 타고 바다건너 오래 걸려 UC Berkeley에 놀러가다. 대학원생 때 다니던 거리를 보니 고향에 온 것같이 마음이 푸근해진다.

11일(日): 한인교회(NCBC)에서 예배보다. 거금을 들여 한국의 보험회사를 통해 J Visa 소지자 가족을 위한 AIG 의료보험을 구입하다.

13일: 아내와 인섭이(큰아이)가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치르다. 채첨자는 한국전에 참전하였단다. 그래서인지 인섭이의 시험문제는 채점을 후하게 해주는 것 같다. 동부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지도학생이 이메일을 보내다. 새로운 환경에 다소 흥분돼있는 것 같다. 그 점에선 나도 별 차이가 없다.

14일: 밤에 인섭이에게 운전실습을 가르치기 시작하다. 미국에 온지 그동안 2주일이 흘렀다. 처음의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은 지나고 이제는 긴 휴가중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주 사이에 몇 달치 월급을 쓰다. 안식년을 해외에서 보내려면 경제적으로 상당히 준비하여야 가능할 것 같다.

15일: Stanford에 와서 처음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하다.

16일: California주 운전면허증을 우편으로 발급받다.













17일(土): Garage sale을 여러 곳 뒤진 끝에 싸지만 쓸만한 식탁을 간신히 구입하다. 아직 의자는 없다. 가족과 버스로 San Francisco에 놀러가다. 차 보험가입이 아직 안돼서 먼 곳으로는 차 몰기가 겁난다. 딤섬을 먹고 Fisherman's Wharf를 구경한 뒤 케이블카를 타다. 역시 큰 도시는 재미거리가 많다.

21일: 인섭, 기섭이와 자전거로 기섭이의 고등학교까지 다녀오다.

23일: UCLA에 다니는 94학번의 김연서가 찾아오다.













24일(土): Garage sale에서 식탁의자 두 개만 사다. 가족과 용감히 차를 몰고 Berkeley에 놀러가다. 옛날 대학원생 때 살던 학교아파트, 인섭이의 초등학교, postdoctor 때 살던 아파트, 수학과 사무실에 찾아가서 감상에 젖어보다. 15년 전 교회를 같이 다녔던 이민 온 분들과 만나다. 그들의 이민생활에는 미국친구가 거의 없다고 한다. 자녀들도 거의 한국친구하고만 어울린단다. 이 자녀들이 요즘 와서 한국과 한국말을 배우려고 하며, 지난 월드컵 때는 한국을 열성적으로 응원했다고 한다.

25일(日): Stanford 캠퍼스 가운데의 Memorial Church에서 예배보다. 내부가 화려하다. 여기서 인상적인 한국인 모자를 만나다. 아들은 심장내과 전문의인데 훌륭한 어머니의 훌륭한 아들이다. 이민생활에 성공한 가정을 보니 흐뭇하다.


27일: 기섭이의 고등학교 첫 수업일. 첫날부터 숙제가 많다. 오늘에야 차 보험이 승인되다. 지난 18일동안 무보험 운전을 한 것이다. 떠나오기 전 은행에서 가입해둔 인터넷 뱅킹을 통해 한국의 은행계좌에서 여기의 내 은행계좌로 생활비를 송금하다.

28일: 지난 4주간 가족과 함께 지내던 인섭이가 개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가다. 자식이 크니 집을 떠나게 되는구나. 겨울방학에 다시 보기를 기약하다. 지도학생이 논문을 제출한 저널에서 받은 논문심사서를 보내오다. 내용을 읽어보니 심사인은 Stanford의 내 연구실 바로 앞방에 있는 교수인 것 같다. 세상이 좁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적절한 곳을 방문중인가?

29일: 인섭이에게 전화해 보니 한달 간 비운 우리 집은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31일(土): Garage sale에 갔으나 허탕. garage sale은 거지세일인 것 같다. 오후에 여기서 좀 떨어진 UC Santa Cruz에 놀러 가다. 넓디 넓은 목장같은 캠퍼스가 마음에 든다.

9월 1일(日): Garage sale에서 식탁의자를 2개 마저 사다. 미국에 온지 한달이 지나서야 제대로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게 되다.

2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축구하다 허리를 다치다. 브라질 사람들과 뛰다가 무리를 한 것이다.

4일: 인섭이와 인터넷으로 화상을 보며 얘기하다. 좋은 세상이다. Stanford로 떠나오기 3주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간 이사하던 바쁜 와중에 진전이 있어 오늘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다.

14일(土): Salinas라는 도시에 가서 John Steinbeck 박물관을 구경하다.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근처의 Monterey Beach에도 가보다. 작년 MSRI 학회 도중 소풍왔던 곳이다.













19-22일: Minnesota 대학에서 열리는 Yamabe Conference에 참가하다. 이 대학에 근무하던 일본계 수학자 Yamabe를 기려 2년마다 열리는 학회이다. 여기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다, 대학원생 때 친구, postdoctor 때 친구등... Rice 대학에서 나의 위상수학 수업을 들은 학생을 이제는 어엿한 수학자로 만나서 그때 얘기를 서로 나누다. 한국의 내 제자와 같은 문제를 연구하는 한 친구는 내게 말하길 그 제자로 하여금 자기 대학에 지원하게 추천해보라고 한다. Gulliver와 공동연구 문제에 관해 논의하다.

24일: Stanford에 유학중인 포항공대 졸업생들을 우연히 만나다. 타지에서도 서로가 인연이 있으면 만나는 법.

25일: 가을학기가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하다.

(2002년12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