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의 해군사관학교 방문


지난 오월 하순 5주간의 이태리 불란서 출장준비로 여념이 없을 때 서울대학교 독문과 고원 교수(65차)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해군사관학교 교관출신 서울대 교수들이 칠월 중순에 일박이일간 해사를 기념방문 하는데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1981년 7월 31일 전역신고를 마치고 퇴근버스에서 내 눈에 깊이 담아뒀던 해군사관학교. 30여년간 내 마음의 언저리에 남아있던 그 해사에 이제야 다시 방문하게 되는 것이었다. 유럽 출장 도중 로마와 빠리의 뒷골목을 거닐 때 해사에서 보낸 4년간의 기억의 단편들이 하나둘씩 내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불란서의 땅끝 마을 브레타뉴 지방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학회 동료들과 10km 달리기를 할 때는 사관후보생 훈련시 힘들게 구보하던 함대사령부와 진해시의 거리를 그려보았다. 차가운 켈트 해 바다에서 덜덜 떨며 헤엄칠 때는 해사생도들이 가입교한 겨울날 물속에 들어가야 하는 옥포만의 바다가 생각났다.

1977년 나는 넉 달간의 66차 사관후보생대 훈련을 마치고 해군소위로 임관하였었다. 그리고 4년간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해사 34기가 2학년이었는데, 그해부터 전역할 때까지 34-39기 생도들에게 미적분, 응용수학, 선형대수 등을 가르쳤다. 젊음의 패기가 넘치고 앞날의 꿈이 무르익던 내 청춘의 소중한 4년을 진해시 앵곡동 해군사관학교에서 보낸 것이다.

유럽에서 귀국한 후 나흘째 아직 시차적응을 힘들게 하고 있던 날 나는 해사 교관출신 서울대 교수 14명과 김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해공항에는 해사 교학처장 류재현 대령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우리의 해사방문 일정을 매우 치밀하게 추진하였으며, 항상 웃는 표정으로 일행을 인도하였다. 류대령이 쓴 근무모는 우리가 써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것이라 인상적이었다. 김해에서 마진고개와 진해시를 거쳐 드디어 해군사관학교에 도착하였다. 입구를 지날 때 일행을 태운 소형버스에는 나지막한 탄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수없이 당직을 섰던 위병소와 이인호 소령 동상이 오랜 친구처럼 우리를 맞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우리는 윤공용 교장님을 접견하였다. 해사소개 영상으로 보고들은 해사의 현황은 30년 전의 사관학교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국력이 많이 신장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해사생도의 입학성적이 서울대 연고대생들의 수준과 같다는 말로부터 현재 해사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이어서 생도사로 옮겨 생도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다. 교수 두 명씩 생도들과 한 테이블에서 얘기를 하며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배고팠던 사관후보생 시절 군대 밥을 좋아하던 나에게 이날의 생도음식은 오랜만에 맛보는 성찬이었다. 식사시간이 더 길었다면 생도들과 더욱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리라.

이후 우리는 교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자 준비해온 제목으로 생도들에게 한 시간씩 강연하였다. 내가 준비한 비누방울의 수학이란 내용에 관심있는 생도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나는 OHP 화면을 보여주며 27년 만에 다시 해사생도들을 가르치는 기쁨을 누렸다. 많은 생도들은 처음 접하는 수학에 호기심을 보여줬고 일부 생도는 강연시간을 허송치 않기 위해 강의실 뒤로 가 서서 경청하였다. 강연을 시작하며 나는 생도들에게 한창 젊을 때 많은 꿈을 키워갈 것을 부탁하였다. 학업과 훈련으로 힘든 생도생활 중 꾸어둔 미래 비젼의 꿈은 평생 멋진 삶으로 이끌어 주는 등대가 될 것이라고 나는 말하였다.

내가 강연을 한 곳은 통해관 1층 현관 왼쪽 첫 강의실인데 바로 옆방, 현관 왼쪽 교관실이 바로 30년전 내가 근무하던 곳이었다. 이 교관실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도들이 아침에 통해관으로 절도있게 행진해오는 모습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당시 나와 같이 교관실을 쓰던 해사 24기 조덕운 소령(미 해사 위탁교육 수료)은 생도들의 이런 행진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곤 하였다. 이 교관실은 내가 젊은 시절의 꿈을 키워가던 곳이었다. 여기서 나는 장차 아름다운 수학정리를 증명할 꿈을 꾸었고, 감명 깊은 책을 읽으며 멋있는 글을 쓰는 꿈을 품었다. 해군시절의 꿈은 내 삶의 등대빛이 되어 오늘도 내 학문인생을 비춰주고 있다. 그런데 이 통해관이 올해 말 철거된다고 하니 이번 방문에서 해사의 역사적 건물을 마지막으로 찾아본 것은 다행이었다.

강연 후 우리는 함대로 이동하여 대조영 함을 견학하였다. 2차대전 당시 미 해군이 썼던 구축함과 LST에서 교육을 받던 우리에게 길이 150 미터의 4,500톤급 차세대 한국형 구축함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대조영 함에 근무하는 수병, 하사관, 장교와 함장의 모습에서 우리는 옛 해군가족의 친밀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구축함을 떠나며 나는 훈련 시 부르곤 했던 군가 ‘앵카송’의 분위기에 젖어보았다.

해사로 돌아온 우리는 연병장에서 63기 12차 연대 근무교대식을 지켜보았다. 아울러 서울대 교수 환영행사와 심명보 제독의 전역식을 한 후 드디어 생도들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1977년 이 연병장에서 66차 사관후보생 임관식의 분열에 나는 직접 참여했고 그 이후 매년 해사 졸업식 때마다 분열을 지켜보았었다. 그러나 이날 단상에서 본 해사생도 분열의 감흥은 달랐다. 7월의 뙤약볕 아래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군악대의 해군가에 맞춰 각 중대가 생도다운 절도와 힘이 넘치게 행진하던 분열은 한마디로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매년 봄 진해시에 만발하는 벚꽃은 자연이 공들여 피우는 아름다움이라면, 옥포만 연병장에 펼쳐지는 분열은 해사생도들이 땀과 정성으로 피우는 아름다움이었다.

저녁 때 우리는 해사의 여러분들과 회식 자리를 가졌다. 교장님의 주도로 약주를 들며 각자 한마디 씩 하였다. 부친과 남동생, 조카 3대가 해사동문인 소비자아동학부 여정성 교수는 우리의 해사방문이 이뤄지도록 노력하던 지난 몇 년간의 경과를 얘기하였다. 언어학과 권재일 교수는 매일 출근길에 해군군가 CD로 군가를 들으며 운전한다고 색다른 토로를 하였다. 감동받은 좌중은 그의 애창 군가 해양가를 따라 불렀다. 화학부 김희준 교수는 훈련 중 기수구보를 할 때 몇몇 사관후보생이 도중에 쉬었던 게 드러나 다음 날 총원이 다시 기수구보 한 얘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나는 해사 근무 4년째 대위 진급 후 이번 방문에 동행한 동기생 전기공학부 박영준 교수의 동생과 결혼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소위 때 배운 가요 ‘연안부두’를 호기있게 부르기 시작하였으나 중간에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옆자리의 해사 사회인문학처장 이승렬 교수와 한창 얘기를 하던 중 그가 내 미적분 수업을 들었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서로 매우 반가와 하기도 했다. 그리고 윤영식 부교장님과 자리를 함께 하여 30여년전 두 생도에게 일어난 사건, 당시의 생도대장 등에 관해 기억을 되살리며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또한 해사 교수부의 발전방안에 관한 계획도 관심을 가지고 들었다.

그날 밤 최신 시설의 생도사 한 방에서 동기생이었던 심리학과 이춘길 교수와 30년 전 가르치던 얘기를 서로 나누며 해사에서의 첫 밤을 맞이하였다. 이튿날 시차 때문에 일찍 깨서 뒤척이다가 5시 45분 각 방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구령소리를 들었다. “생도 총기상. 망해봉 훈련 15분 전.” 곧 이어 생도사에 울려퍼지는 기압소리는 생도들이 기상하는 소리이리라. 조금 후 망해봉으로 떠난 생도들은 30여분 후에 돌아왔다. 이때 내 방 창문으로 생도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투복 차림에 K2 소총을 자유롭게 들고 삼삼오오 오순도순 얘기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여생도도 보였다. 복장과 소총만 뺀다면 서울대학교에서 보던 학생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생도들은 학업뿐 아니라 저렇게 수시로 훈련에 임해야 할 것이고, 임관 후 명령에 따라 동서남해 각 곳에 군함을 타고 출동을 갈 것이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 시에는 제2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윤영하 소령 못지않게 용감하게 해전에 앞장서리라. 생도사 1층 명예홀에 위치한 윤영하 소령의 금빛 흉상을 보며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을 뒤늦었지만 정부가 제대로 예우하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해사는 삼군 사관학교 중에서 가장 센 훈련을 받고 있다는 익히 알고 있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 방문 중 읽은 해사학보에서 한 여생도가 호주 국방사관학교 생도들의 자율활동을 부러워하는 것을 눈여겨 읽어보았다. 힘든 훈련과 자율활동을 어느 정도 배합해야 최강의 생도를 키워낼 수 있는가? 이것은 진지하게 연구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이날 오전 우리는 네 그룹으로 나뉘어 취미활동에 참여하였는데 나는 일곱 명의 교수와 함께 요트를 탔다. 생도 특별활동용의 꽤 큰 이 요트는 잔잔한 해사반도를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수영훈련 할 때 반환점이 되는 무인도를 지나 요트는 진해만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넓은 바다로 멀리 나가니 해사 통해관, 연병장과 생도사는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이고 함대도 가물가물 보였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돛에 듬뿍 담아 요트는 거칠어지는 바다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파도 따라 흔들리는 요트 뱃머리에 앉아 여름 햇빛을 듬뿍 받으며 함대, 해사, 천자봉을 한참 응시하다 보니 어느덧 과거 해군의 모습들이 내 눈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손원일 제독이 미래 해군을 설계하던 모습, 이인호 소령이 해병혼을 키워 가던 모습, 지덕칠 중사가 사격훈련을 하던 모습, 최재경 대위가 진리의 바다 항해준비를 하던 모습, 윤영하 소령이 희생정신을 배워가던 모습이... 지난 60년간 진해를 거쳐 간 모든 장병의 해군시절 시공간의 편린들이 작은 물결이 되어 진해만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2008년 10월

(해사학보 2008.12.22일자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