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학회 다녀온 이야기


1999년 유월 하순 기다리던 여름방학은 시작되었으나, 별로 달갑지 않은 연구비 신청 문제로 과 교수들은 서류더미와 씨름하며 여름을 맞이해야 했다. 연구계획서 등을 작성하는 힘든 작업은 7월 초순 내가 해외출장을 떠나기 바로 전날에야 간신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태리 행 비행기에 홀가분히 타게 되었다. 공항에 배웅 나온 아내의 담담한 모습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지루한 비행시간은 포도주 마시고 강연(talk) 준비하며 보냈다. 로마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Bari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으로 자정이 넘었다. 그러나 마중 나오기로 한 호텔 차는 보이지 않았다. 30분 넘어 기다리니 공항에는 인적이 거의 사라지고 엄청난 택시 요금을 요구하는 운전사들만 내 마음이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반갑게도 호텔에서 보낸 차가 나타났다. 여행 때 가끔 맛보는 짜릿한 불안감을 이번에도 겪은 것이다. 졸림 속에 90km를 달리고서야 Martina Franca라는 조그마한 도시에 도착하였고 별 넷 짜리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니, 집을 떠난 지 22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태리의 지도를 장화로 보면 Martina Franca는 발뒤꿈치 부분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이다. 이오니아 해와 아드리아 해 사이 431m 높이의 구릉에서 완만하게 뻗어지는 이트리아 계곡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이 바로크 풍의 도시는 이 지역의 발달된 농업을 기반으로 하여 1310년에 형성되었다. 내가 묵은 호텔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Martina Franca의 주 광장인 Piaza XX Settembre 광장이 나타나고, 그 끝에 서있는 고풍스런 문을 지나면 Old Town이 시작되며, 또한 학회가 열리는 시청건물인 Palazzo Ducale가 있다. 1668년에 Caracciolo 가문이 세운 이 웅장한 바로크 스타일의 건물에는 300개의 방이 있는데, 그 중의 한 홀에서 극소곡면 학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 자그마한 홀은 사방과 천장에 온갖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첫날 이 홀에서 나는 여러 학문의 지기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이 학회에는 극소곡면을 전공하는 50여명의 유럽인들과 소수의 미국인, 브라질인 들이 모여 한 호텔에서 9박 10일 동안 숙식을 같이 하며, 그 동안에 밀린 수학얘기를 마음껏 하였다. 4명의 수학자들이 2, 3번의 연속강연을 하였고, 17명이 talk을 하였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식사를 호텔 레스토랑에서 함께 하였다. 두서너 명이 모여 식사하며 하는 얘기는 2/3정도가 수학에 관한 것이지만, 그 외에 각 나라 사정과 수학자들의 살아가는 얘기도 하게 된다.

첫날 저녁식사는 내 지도교수 Schoen에게서 처음 학위를 받은 Micallef가 배출한 제자, 즉 학문적으로 내 조카가 되는 Arrezzo와 함께 하였다. 그는 나중에 talk 할 때 보니 칠판에 쓰기보다 주로 얘기만 하는 특이한 연사였다. 그가 몇 년 전 Stanford에 방문했을 때 Schoen이 말하길 내가 안식년으로 곧 Stanford에 올 것이라고 했단다. 내 사정으로 결국 못 가긴 했지만 Schoen은 내가 오는 것을 기다렸었나 보다.

빠리 7대학의 Rosenberg가 내게 요즘 무엇을 연구하고 있냐고 묻기에 double bubble 을 한다고 말했더니, 그것은 이미 스페인의 Ros 등이 해결해 가고 있다 한다. 둘째 날 저녁을 Ros, Perez와 같이 하며 이에 대해 물어 봤더니, 그들의 접근 방법은 나와 달라서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씁쓸해진 것은 사실이며, 나도 이 연구를 느긋하게 하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었고 이제 좀 서둘러야 할 입장이 되었다. 이들과 서로의 아이들에 관해 얘기하다가 이상하던지 내게 몇 살이냐고 묻고는 내가 생각보다 나이 들었다고 한다. 하기야 예전에는 학회에 참가해보면 내가 제일 젊은 축에 들었으나 이제는 어느새 늙은 축에 들고, 요즘 학회에서는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 나있는 postdoc 들도 눈에 띄는 것을 보면 그만큼 세월이 나도 모르게 흘렀나 보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한 곱상하게 생긴 postdoc Martin이 두 달 전에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이 학회에 왔다 길래, 내가 신혼이라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겠다고 그랬더니 얼굴이 빨개진다. 셋째 날 점심은 네 명의 스페인 수학자들과 들었는데, 스페인에서도 SCI 저널에 나온 논문을 중요시한다고 말해서 한국도 그렇다고 하니 모두 낄낄댄다. 자기네는 아직 impact factor까지 고려하지는 않는다며 한국과 스페인이 함께 좋은 저널을 만들어 보자고 한다. 중진국의 수학자들은 비슷한 애환을 안고 살아가는가 보다.

Rosenberg가 나에게 저널 Commentarii에서 내 논문의 심사인이었다고 말해서, 내가 어떠어떻게 알고 있었다고 하니까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며 웃어버린다. 자기도 최근에 Commentarii에 논문을 제출했더니 편집장 왈, 싣기로 예정된 논문이 너무 많이 밀려 여섯 달 동안 아무리 좋은 논문이라 해도 싣지 않기로 했다며 그의 논문을 반송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주 그 편집장에게서 Commentarii를 위해서 논문심사를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어떻게 된거냐고 따졌더니 그 여섯 달이 지난주에 만료됐다는 것이었다. 편집장이 되려면 아마 말솜씨도 수준급이어야 하는가 보다. 한편 수학자 M이 내 논문을 심사하고 게재추천을 할 때 심사평가서를 편집인 뿐 아니라 내게도 보냈다고 얘기하니까 Hoffman이 그것은 지나친 솔직함이라며 빈정댄다. 나도 그 심사평가서를 M에게서 받고 뜻밖이기는 했다.

빠리 7대학에 있는 모로코 인 postdoc Souam과 얘기 도중 실망스런 소식을 들었다. 내 학생이 쓰고있는 논문에 대해 얘기했더니 그 문제의 상당부분을 이미 내 학문적 동생인 Jagy가 풀어서 발표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문제는 넉 달 전 내가 참가했던 Johns Hopkins 학회에서 한 스페인 수학자가 발표한 연구결과에서 힌트를 얻어 내 학생에게 준 문제였다. 이 문제를 찾은 내게도 성취감이 있었기 때문에 내 학생 못지 않게 나도 실망했으나, 이게 인생이니 어떻게 하랴.

셋째 날 오후 내 talk이 있었다. 이날까지 준비하는 일로 매우 바빴었다. talk 도중에 많은 질문이 있어서 좋았고, 끝나고 나니 nice talk이었다고 한다. 한시간 가까이 talk하고나면 좌중에 있던 청중들과는 이전의 거리감이 많이 줄어듦을 느낄 수 있고, 보다 가까워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talk이라는 것이 마음을 열고 하는 것도 아닌데 청중들은 talk으로부터 연사의 개성을 많이 파악하게 되는가 보다. 이날 느긋한 마음으로 저녁을 들었고, 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샀다.

이날 밤 마침 Martina Franca에는 시민들을 위한 축제가 있었다. XX Settembre 광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노래와 묘기공연이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이태리 가수들이 이태리 칸쪼네와 미국 팝송을 꽤 잘 불렀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태리 인이 이태리 노래를 부르는 게 정말 멋있었다, 이태리 인들 끼리야 미국 노래에 대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의 그들다움이 보고 싶은 것이다. 한 사람이 인상적인 묘기를 선보였는데 자기 몸에 횃불을 갖다 대고 그 불을 입에 삼켜 끄는 것이었다. 사회자가 그를 소개하는데 internazionale 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보면 그가 국제적으로 알려진 묘기 공연자라는 말인 것 같다. 이태리 인들도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는가 보다.

두 조용한 브라질 인들과 저녁을 들며 얘기했는데 그들은 이태리 인이 불란서 인보다 마음이 더 열려 있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독일인은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어렵지만 관심을 가져주면 좋아한다. 그런데 마음이 더 열려있다고 깊이 가까워질 수도 있는가? 어차피 인간은 자신을 지키면서 서로를 대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학회에 열흘동안 같이 먹고 자고 얘기하며 지내니 많은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다. 말 붙이기 힘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저 각자 편하게 지내고 함께 있을 때는 분위기에 맞게 지내면 될 뿐. 주로 끼리끼리 모이게 되지마는 마음이 잘 통하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같이 토론할 수학 문제가 있는 한 계속 얘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수학하며 얻는 뜻밖의 소득이 아닌가?

이 두 브라질 사람들(Miguel과 Vincente)은 적도 근처의 Fortaleza에서 왔는데 매우 순박한 게 인상적이었다. 이들과는 처음 만나는 것이지마는 그들은 내 논문을 이미 읽어봤다고 한다. 그들에게 리오 데자네이로를 배경으로 한 영화 Orpheus Negro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른다고 해서 주제가를 불러주니까 그제야 안다고 한다. 몇 달 전에 그 영화를 브라질에서 다시 제작했다고 한다. 3년 전 리오에서 열린 미분기하 학회 얘기를 재미있게 하였다. Vincente가 그날 포도주를 샀는데 나보고 Fortaleza에도 한번 방문하랜다, 예쁜 아가씨가 많다는 말을 덧붙이며.

동료들과 식사를 같이 하며 얘기하다 보면 자기의 고민문제 얘기가 나오게 된다. Rosenberg는 자기가 이런 쉬운 것을 못 푸나 하고 자괴감이 드는 문제를 얘기하고, Hoffman은 쓰라린 기억을 갖고있는 문제를 꺼내고, 나도 내 골칫거리 문제를 고백하였다. 상대방의 고민거리는 내가 혹시 다른 시각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문젯거리는 상대가 어떤 실마리를 풀어주지 않을까?

수학자들의 대인관계에서 개개인의 태도는 그가 수학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에 조금은 좌우되는 것 같다. 유명한 수학자일수록 그 자신만만한 태도로 인해 접근하기가 힘들고, 스스로 실력이 대단치 않다고 생각하는 수학자일수록 태도가 소탈해진다. 수학자들의 사회는 평등한 사회가 아닌 것이다. 아마도 모든 학문사회가 다 이러하리라. 심지어는 미녀들의 모임에서도 이런 성향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미녀들은 성형수술을 쉽게 하는 수가 있지만, 수학자들은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Bonn 대학에서 온 Weber는 이번 학회에서 처음 만나지만 그전에 자기의 computer graphics를 내 홈페이지에 싣도록 저작권을 허락해줬던 postdoc이다. 수학자끼리는 이런 저작권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애초에 돈이 생기지 않는 학문이므로. Weber의 얘기가 최근 Bonn 대학에서 교수 4명이 회갑잔치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직장을 구할 젊은 수학자들이 그 파티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겠다고 얘기했더니 껄껄 웃는다. Toulouse 대학의 Collin은 너무 과묵하지만 믿음직한 친구이다. Rosenberg의 제자였고 최근에 Nitsche conjecture를 푼 경력의 수학자인데, 그는 10년 전 불란서의 Luminy에서 열린 극소곡면 학회에서 유일하게 불어로 talk을 하여 매우 인상적이었었다.

Weber가 포도주를 사던 날 Rosenberg는 자기에게 Collin보다 잘하며 제일 뛰어났던 학생이 있었다고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 학생은 수학 연구보다 돈버는 게 더 낫겠다며 그만두었는데, 그로서는 어떻게 설득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자신의 아들도 수학을 전공했으나 돈벌기 위해 관뒀다고 그는 고백하였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은 이제 수학을 중단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이 자리에서 Weber와 Ros는 또 극소곡면을 하다가 떠난 Wei와 Callahan의 얘기도 꺼냈다. 나는 학위를 받자마자 수학을 그만둔 내 학생 얘기를 하였다. 떠난 사람에 관해 모두 담담하게 얘기하였지만 아마도 모두가 나처럼 가슴 한구석은 좀 허전할 것이리라.

나흘동안 계속되던 학회가 휴식에 들어가는 토요일 오후, 나는 사진기를 들고 시청건물 앞에서 시작되는 Old Town의 구경에 나섰다. 흰 횟칠을 한 집들은 수백년 동안 다닥다닥 붙어 지어졌고 이를 따라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오랜 삶의 체취와 흔적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town이었다. 곳곳에 바로크, 로코코 스타일의 오래된 건물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보다 더 재미있던 것은 집 사이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나면서 여기 이태리 인들의 사는 모습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점이다. 지도가 있었지만 깊은 골목에서 길을 잃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점심 직후의 수면시간이라선지 사람들은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가끔 집 앞에 나와 앉아있는 작은 체구의 노인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큰길에서 본 사람들은 다듬어지고 가식에 가려진 얼굴이었으나, 여기서 본 사람들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요일에는 학회 측에서 준비한 대로 Monticelli 바닷가의 해수욕과 인근 도시 Ostuni의 구경 길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Martina Franca에서 벗어나고 보니, 아드리아 해 쪽으로 아주 완만하게 펼쳐지는 이트리아 계곡에는 원뿔모양의 지붕이 있는 하얀 돌집 trullo가 푸른 포도밭과 함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모습이 이방인의 눈길을 강렬히 사로잡는다. 하얀 회를 칠한 집 위에 서너 개의 원뿔형 돌 지붕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인간과 우주를 연결시켜준다는 돌덩어리가 얹혀져있는 집을 trullo라고 불렀다. 이것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데 로마시대 이전에 이미 이런 집들이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아드리아 해의 바닷물은 차지 않았으나 파도가 좀 셌다. 동료들과 해수욕을 하고, 호텔에서 가져온 샌드위치 점심을 먹고, 다같이 사진을 찍었다. Hoffman과 Weber는 아까 버스를 타고 올 때부터 얘기하던 연구문제를 작렬하는 햇빛속의 바닷가에서도 계속 토론하고 있다. 나도 브라질 대학원생들하고 얘기를 오래 하였는데, 강연이 끝나는 오후에 동료들과 축구를 하자는 얘기도 나왔으나 장소가 마땅치 않아 아쉽게 무산되었다. 내 앞쪽에 두 여인이 topless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아드리아 해의 파도소리,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 토플리스의 여인..... 나의 일상에서 많이 벗어난 주위환경이었다.

바닷가를 떠나 근처의 오래된 도시 Ostuni로 가다. Martina Franca의 Old Town 보다 더 크고 깊은 도시이다. 수백년에 걸쳐 다닥다닥 지어진 흰 집들. 그 사이로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 인적은 뜸하고 관광객만 간혹 지나간다. 그리고 어쩌다 가끔 보이는 노인들. 자기 집 앞 골목길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다. 거의 움직이지 않고 주름이 깊이 파인 무심한 얼굴. 내가 지나가도 고개만 조금 내 쪽으로 향할 뿐 무심하긴 마찬가지. 수백년의 세월의 무게가 흰 집들을 누르고 넘쳐나 이 노인을 꼼짝 않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랜 삶을 산 노인이 차츰 집 앞 흙의 일부로 스며들어 가고 있는 것인가? 바로 옆 골목 담 뒤로 넓은 평원과 푸른 아드리아 해가 보인다. 걸음을 재촉하여 공간이 탁 트이고 시간이 빨리 돌아가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으나, 꼬불꼬불 골목길의 낡고 흰 집들과 깊은 주름의 무표정한 노인들은 지금도 때때로 내 머릿속에 되살아나며, 긴 시간의 무게를 실감케 하곤 한다.

하루를 쉰 우리는 다시 사흘 동안의 일정에 들어갔다. Meeks는 브라운 운동과 극소곡면에 관해 얘기하였는데 재미있는 강연이었다. 혹시 integral geometry와 연관이 있지 않은지? 내 등주부등식 문제와 어떤 연결이 되지 않을까? 몇 달 전에 생각해둔 idea도 역시 계속 추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Talk을 들어보면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연구결과도 많이 발표한다. 취직과 승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기도 하겠지만 또한 그러다 보면 좋은 논문을 쓸 가능성이 생기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두어 명이 모여서 얘기하며 쉽게 공동논문을 쓴다. 바꿔 말하면 협력해서 논문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란 셈인데 이것도 연구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소수의 talk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talk에 정신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보통 연사가 강연하는 도중 talk과 상관없는 내 문제를 생각하게된다. 오히려 이때 연구의 진전이 많이 이루어지는데 이 진전도 talk의 영향이니, talk을 집중해서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연사는 그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niche(적소)를 찾아가는 것일 뿐. 내가 내 자신의 얘기를 남에게 들려줘야지 남을 흉내 내거나 남의 얘기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학회에 참가하면 자극을 받고 자신감을 얻으며 위기의식 또한 느끼게되는데, 이를 통해 자기자신을 좀 더 알게 된다. 그리고 학회를 통해 수학을 알게 되고 참가자를 알게되고 결국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브라질의 수학자 중에 Costa라는 사람이 있다. 1983년 대학원생이던 그는 200년만에 처음으로 중요한 극소곡면을 발견하여 수학계의 일부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그후 그의 곡면은 매우 유명해져서 그의 아내는 전세계의 Costa surface에 관한 신문기사를 수없이 스크랩 했단다. Costa 곡면으로 미국, 독일의 조각가들은 조형물도 만들었다고 한다. 수백년 후에는 아마도 이 학회에 참가한 모든 수학자의 이름은 잊혀지고, 그의 이름만 알려져 있을 것이란 얘기를 저녁 식사 중 누가 하였다. 수학자의 업적에는 운도 상당히 따라야 하는 모양이다. 그는 리오에 바나나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데, 집보다 농장에 관심이 더 많다고 그의 아내는 불평이랜다. Costa는 요즘 학생을 키우는 일에 전념인데, 그의 학생들 중 세 여학생이 매우 예뻐서 Rosenberg가 질투가 난다며 파안대소하다.

오후에 강연이 끝나면 시청건물 앞의 카페에서 우리는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번은 얘기 도중 나와 옆자리의 Ros, Martin과 Miguel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앞자리 사람에게 사진기를 건넸더니 Ros가 하는 말이 "내 학교와 아내에게 내가 유럽에서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정말 학회에 참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진이구나" 해서 "내 옆자리에 남자가 앉아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라고 맞장구 치다.

이 학회를 주관한 사람(organizer)은 이태리의 Pirola이다. 그는 Pavia 대학에 있는데 얼굴은 동안이고 좀 수줍어 하지만 사람 성격이 좋아 보인다. 나는 넉 달 전 Johns Hopkins학회에 참가했다가 거기서 Rosenberg로부터 이 학회가 곧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여기에 올 수 있게 되었다. Pirola에게 불러줘서 고맙다고 얘기했더니, 이 학회는 유럽인들을 위한 것이어서 Hoffman과 나를 부르기 위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내가 이 학회 참가기를 수필로 쓰겠다고 얘기했더니 내 수필을 자기도 읽어보고 싶단다. Organizer로서 궁금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번역이 힘든 일라고 그에게 솔직히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Organizer는 많은 일에 신경을 써야하고 상당한 업무를 맡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회에 참가하기는 좋아하지만 organizer가 되기는 꺼린다. Rosenberg는 나보고 한국에서 한번 학회를 열라며 내 의중을 떠본다. 본격적인 극소곡면학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몇 달 후 한국고등과학원의 미분기하학회에 Rosenberg와 Ros를 초청했으나 본인들의 개인사정으로 못 오게 되었다. 유럽 학회가 부러운 점은, 학회에 참가할 수 있는 수학자가 주변에 많다는 것은 물론이고, 비싸지 않고 좋은 호텔과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 그것이다. 음식이 별로여서 독일의 학회는 가고싶지 않다고 농담하는 사람도 보았다. 한편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는 더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참가자끼리의 유대관계는 좀 적고 개인적인 활동위주이다. 유럽에서의 학회는 좀 느슨하면서 가족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드디어 수요일 오후 Meeks의 강연을 끝으로 학회가 끝났다. 참가자들은 organizer인 Pirola가 끝맺음의 말을 하길 바랬으나 그는 그저 넘어가 버렸다, 그의 식으로 자연스럽게. 9박 10일이라는 기간이 조금 긴 편이어선지 참가자들은 조금 지친 모습이었다. 8시에 기념만찬이 있었다. 식사와 함께 포도주를 적지 않게들 마셔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갔다. Pirola에게 우리의 선물이 전해지며 흥이 돋아졌다. Sweet wine이 더 나와 계속 마시던 중 11시쯤에는 호텔 앞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 얘기를 계속하였다. 사람들은 이 Martina Franca를 떠나 집에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이 밀려있을 것에 대해 염려하였다. Hoffman은 수백개 쌓여있을 e-mail에 대해, Ros는 논문과 강의록을 써야할 것과 애들과 놀아줘야 할 것에 대해 걱정하였다. 한 시가 돼서야 다들 일어났고 젊은이들은 맥주 마시러 또 밖에 나갔다. 나는 짐을 꾸린 뒤 두 시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사람들은 비행기와 기차 출발시간별로 조가 짜여져 호텔을 떠났다. 나는 아침에 호텔 차로 Bari 공항을 향했다. 동승한 독일 여자 postdoc Lishke와 이얘기 저얘기하는 동안 내 눈앞에는 완만히 내려가는 이트리아 계곡과 그곳에 점점이 흩어져있는 하얀 trullo와 포도밭이 계속 펼쳐졌다. 학회가 예정보다 하루 일찍 끝나게 돼서 Roma로 하루 먼저 올라가고 싶은데, 일정변경이 안 되는 비행기 표여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이태리 항공 Alitalia 측에서 그냥 넘어간다. 역시 융통성이 많은 나라이다. 그리고 비행 도중에는 조종실 문을 자주 열어놔서 그 속을 처음 볼 수 있었는데 이태리 인들은 규칙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가 보다. 그러나 착륙할 때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자마자 안전벨트를 푸는 우리 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끝까지 채운 채로 있는다.

정오에 로마 공항에 도착했다. 뜻밖의 로마 관광을 하게된 것이다. 공항 책방에서 로마 소개책자를 사고 점심을 먹으며 계획을 짰다. 큰 짐은 공항에 맡기고 전철을 타고 시내로 가서 Colosseo에서 내렸다. Pantheon을 거쳐 Sant' Angelo 성까지 걸어가며 호텔을 찾아 나선 끝에 간신히 여행자 안내소의 도움으로 별 셋 짜리 호텔을 7만원에 구했다. 말이 별 셋이지 수준은 떨어지는 곳이다. 발이 아파 좀 쉬고난 뒤, 근처의 성 베드로 성당에 갔더니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은 출입금지라고 한다. 하는 수 없이 Sant' Angelo 성을 구경하고 Pantheon 근처에서 피자와 맥주로 저녁을 때우다. Martina Franca의 거리에서는 동양인이 없어서 이태리 인들이 간혹 나를 호기심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로마의 거리에는 관광객만 보이고 이태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거리의 건물은 웅장하긴 하나 우중충하여, 빠리와 비교해보면 고대건물이 많으나 풍요로움은 떨어지는 것 같다. 도로에는 오토바이가 너무 많아 시끄럽고 운전은 험하게 해서 걷기가 위험할 때도 있다. 로마에 하루만 있으니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에 오래 머무르며 로마의 진수를 맛보리라.

다음날 아침 성 베드로 성당부터 찾았다. 한마디로 웅장하고 유려하여 보는 이를 압도한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Pieta, 라파엘로의 회화, 베르니니의 작품을 내 눈에 오래 담았다. 씨스티나 성당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보지 못해 아쉽다. 한 시대를 풍미한 미켈란젤로의 손길이 곳곳에 남아있는 바티칸 시를 나와서, 시내를 도는 관광버스를 타고 로마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유적들을 먼발치로 보며 한 바퀴를 돈 뒤 Colosseo에서 내리다. 이 원형극장은 14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에는 더 웅장했다고 한다. 이어서 걸어다니며 몇 곳을 더 보고 간단한 쇼핑을 한 뒤 다시 Pantheon 근처에서 저녁을 들다. Pantheon 앞에서 독일 합창단이 멋있게, 자랑스럽게 합창을 한다. 그날 밤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영화 Shakespeare in Love를 재미있게 보았다. Shakespeare의 창조적인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미켈란젤로의 건축과 벽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에 사로잡히게 하듯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주듯이, 수학의 오묘한 정리는 수학자로 하여금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오늘도 나는 수학의 자그마한 아름다움을 찾아 연습장을 뒤적이며 새로운 논문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이 논문을 가지고 갈 다음 학회를 기다리고 있다.

2000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