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원 생활 마지막 해


나의 대학원 생활은 1981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Berkeley에서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다섯 해 뒤 학위논문을 제출함으로써 끝났다. 52개월 간의 교관생활 뒤 얼이 빠진 채로 대학원에 입학한 나는 풋내기 학생으로서 남의 정리를 배우고 남의 논문을 공부하느라 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즈음 나의 정의(definition), 나의 정리(theorem)가 하나 둘씩 만들어지더니 마침내 나의 논문이 써졌다. 대학원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대학원을 졸업한 지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으나 그 당시 풋내기 대학원생이 어떻게 첫 논문을 쓰게 되었는지 지금은 흐려진 기억을 되살려 보고 싶다. 한 중년 수학자가 첫 경험담을 적어 봄으로써 앞으로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고 싶은 것이며, 관심있는 학생들에게도 재미있게 들려 주고 싶은 것이다.

대학원 첫 해에 나는 예비시험(preliminary exam)을 치렀고, 미분기하를 기초부터 독학하였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는 대수학을 전공하고자 생각했었으나, 둘째 학기(quarter)에 미분다양체를 배운 뒤 마음을 바꿔 기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첫 해가 끝나며 첫 애가 태어났고 첫 여름방학에는 식당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둘째 해에는 대학원 미분기하 과목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이때 나의 전공분야가 될 극소곡면(minimal surfaces)을 지도교수가 될 사람으로부터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다. Berkeley 수학과에서는 필수과목이 없어서 내 마음대로 수강과목을 선택할 수 있어 자유로왔지만, 둘째 해에는 자격시험(qualifying exam)을 치르는 게 필수였다. 그러나 나는 미분기하를 뒤늦게 배우기 시작해서 자격시험에 대한 준비가 덜 돼 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수학과에 자격시험의 6개월 연기를 청원하였고 결국 이를 허락받았다. 동료학생들은 한창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시험을 연기하게 됐다고 좋아하던 나를 보고 아내는 시무룩해 하였다.

여름방학 동안 열심히 자격시험 준비를 한 나는 셋째 해 시월 말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자격시험은 구두시험인데 학생이 대학원에서 배운 세 분야를 골라, 이에 대해 다섯 명 교수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세 분야중 하나는 학생의 research topic으로 정하게 된다. 나는 자격시험의 세 분야로서 미분기하학, 타원적 편미분방정식, 극소곡면을 선택하였고, Schoen, Chern, Wu, Kato 교수와 외부위원인 통계학과 교수에게 부탁하여 다섯 명의 시험위원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시험은 시작되었고 시험위원들은 세 분야의 여러 주제에 관해 돌아가며 나에게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럭저럭 대답해 나갔다. 그런데 Wu 교수가 물어 온 미분기하의 여러 문제중 하나는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Cut locus의 measure가 zero임을 보이라는 문제였다. 내가 답하지 못하자 Wu 교수는 힌트를 줬지만 그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의 조금 뻔뻔스러운 태도에 Wu 교수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짜증을 내더니만 시간이 아까왔던지 자기가 가져온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 자격시험은 잘 돼가고 있다가 이렇게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이 때 Kato 교수가 나에게 질문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물어 온 문제는 내가 시험 시작 한 시간 전에 급하게 그에게 달려가 물어 봤던 바로 그 문제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다시 시험은 술술 진행되었고 결국 나는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유학온 지 2년 반 정도, 학교와 학생 아파트만 지키고 있던 나와 가족은 처음으로 바람쐬러 근처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다녀 왔다. 그리고 곧 나는 만 서른 살이 되었다.

자격시험을 치르기 전 나는 Schoen 교수에게 내 지도교수가 돼 줄 수 있겠느냐고 의향을 타진해 봤는데, 그는 내가 자격시험에 통과하면 학생으로 받아 주겠다고 승낙하였었다. 사실은 첫 해에 예비시험을 친 직후부터 그와의 접촉이 있었다. 첫 해 미분기하를 독학할 때 수강했던 과목은 reading course였는데, 그것은 학생이 스스로 공부하되 형식적인 담당교수가 있는 과목이었다. 그 때 Schoen이 나의 담당교수여서 여러 번 쉬운 질문을 하러 그에게 찾아 갔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교수가 정해진 뒤 나는 몇몇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들과 내 스스로 생각해 본 문제 등 대여섯 개를 추려 보았다. 그리고 안식년차 Stanford 대학을 방문 중이던 지도교수와 이 문제들에 대해 상의해 봤는데 너무 어렵거나 하찮은 것들이어서 학위논문 문제로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관심있는 논문을 읽으며 좋은 문제거리를 찾아 보았다. 일단 괜찮은 문제를 찾으면 (또는 만들면) 내가 아는 지식을 동원해 그 문제의 해결을 다각도로 시도해 보았다. 여기까지는 재미있게 진행되었지만 정작 문제해결은 어렵기만 해 매번 내 수학지식의 한계를 실감하였다.

한 번은 어떤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고 드디어 밤 늦게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워서 기쁜 소식을 알렸다. 꿈 같은 하룻밤을 보낸 나는 다음 날 아침 그 문제를 검토해 봤더니 아쉽게도 내 풀이에 오류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야말로 하룻밤의 꿈으로 끝난 이 날을 아내는 아직도 달콤한 기억속에 간직하고 있다.

지도교수가 문제를 제시해 준 적도 있었다. 그가 준 문제는 이러했다. 극소곡면 중에서 위상이 간단한 것은 지난 200여년간 평면, catenoid, helicoid 밖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 해 전에 브라질의 한 대학원생이 genus 1인 극소곡면을 발견하였고, 한 달 전 Hoffman과 Meeks가 이 극소곡면에 self intersection이 없다는 것을 보여, 바로 이것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극소곡면이라고 수학계 일부가 들떠 있었다. 지도교수는 나에게 이 극소곡면의 그림을 보여 주며 genus가 2 이상인 극소곡면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내게 재미있는 문제였다. 나는 Hoffman과 Meeks의 그림을 오랫 동안 관찰하였다. 이로부터 Scherk의 극소곡면과 이 그림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어서 genus가 2 이상인 극소곡면은 어떤 모양이 돼야 할 지 조그마한 아이디어가 생겼다. 그러나 지도교수에게 그 아이디어에 관해 얘기했을 때는 이미 Hoffman과 Meeks가 genus 2 이상인 경우를 해결한 뒤였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 아이디어로부터는 Scherk의 극소곡면과 유사한 것을 새로 만들 수 있어서 나는 약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원 생활 셋째 해는 이처럼 내 나름대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한 해였다. 내 역량이 아직 미숙하여 연구에서 양성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 하였으나 음성적인 발전은 있었다. 무슨 뜻이냐 하며는 연구문제에 대한 한 접근방법이 모처럼 떠오르면 처음에는 그 방법에서 무엇이 틀렸는지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내 접근방법에 무슨 오류가 있는지 찾아 내는 시간이 짧아져 갔다는 뜻이다.

셋째 해 봄 프린스턴 고등과학원을 방문 중이던 지도교수에게서 학생들에게 편지가 왔다. 자기는 다음 해에 쌘디에고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을 방문할 것이라고. 자기의 지도교수였고 동료인 Yau도 프린스턴에서 쌘디에고로 이미 이주했기 때문에, 거기는 미분기하 분야가 매우 활발한 곳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의 학생 열 명 중 두 명은 수학을 포기하고 한 명은 지도교수를 바꾸고, 나를 포함한 일곱 명은 지도교수를 따라 쌘디에고로 옮기기로 했다. 내 연구분야를 바꾸지 않으려면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리하여 넷째 해가 시작되기 직전 추석날 밤, 나는 삼년간 정이든 Berkeley를 뒤로 하고 가족과 함께 U-Haul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밤 새워 보름달을 벗 삼아 트럭을 몰아서 800km 남쪽의 쌘디에고로 이사하였다.

쌘디에고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있는 휴양도시로서 매우 살기좋고 아름다운 곳이다. 은퇴한 노년부부가 많이 사는 곳이어서 생활비는 비쌌으나 주민과 학생들이 Berkeley에서보다 여유있고 느슨하게 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넷째 해 처음 두학기(quarter)동안 지도교수는 기하측도론(geometric measure theory)을 가르쳤다. 이 과목에서 나는 기하학의 해석적인 근본개념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첫 학기가 끝날 무렵 어느 날 수학과 복도에서 지도교수가 나를 불렀다. 표정이 매우 밝은 게 뭔가 좋은 얘기를 나에게 해 주고 싶은 것 같았다. 동료교수이며 1982년 Fields medal을 받은 위상수학자 Freedman이 자기의 연구문제에서 제기된 기하학 문제를 Schoen에게 문의하였는데 지도교수는 그 문제를 내게 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것은 compact인 3차원 리만 다양체의 수 많은 fundamental domain들 중에서 경계넓이가 최소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마침 기하측도론을 써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며칠 곰곰히 생각해 본 나는 그렇게 멋있는 문제 같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도교수에게 이 문제가 사소한(trivial) 문제 같다고 얘기했더니, 그는 이 문제가 하찮은 것이라면 Plateau 문제도 하찮은 문제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비록 내게는 멋있게 보이지 않는 문제이더라도 나는 지도교수의 의견을 좇아 이 문제를 내 학위논문 문제로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두어 달 뒤 나는 이 문제를 정말 사소하게 풀어 버렸다. 그러나 역시 지도교수는 내 풀이에서 중요한 오류를 찾아 내었다. 경계넓이가 최소로 근접하는 fundamental domain들의 sequence는 domain이 unbounded 하게 될 때 그 극한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로부터 일년여 동안 나는 극한이 왜 존재하는가를 보이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Schoen과 Yau와 그 지도학생들은 세미나가 끝나면 배구를 즐겁게 하며 머리를 식혔다. 나는 또 한국 유학생들과 한 팀을 이뤄 교내축구대회에서 가끔 시합을 가졌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근처의 경치 좋은 바닷가에 나가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이렇게 배구와 축구를 하고 바닷가에서 머리를 식혀도 극한의 존재문제는 그 실마리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넷째 해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을 무렵 나의 대학원생활 마지막 해인 다섯째 해는 또 다른 변신을 예고하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도교수가 다섯째 해 첫 학기에 유럽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비행기 요금과 연구조교수당을 대 준다니까 세 명의 학생이 유럽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가족이 있어 망서렸으나, 그 때 본격적으로 진행 중이던 연구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가족과 함께 따라가기로 했다.

유럽에 가기 전에 또 이사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Berkeley 수학과에서 여름 두 달동안 수학을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Berkeley에서는 여름학기의 수학강의를 강의평가가 괜찮은 대학원생들에게 맡겼는데 내가 한 강좌를 맡게 된 것이다. 내 공부에 지장이 되기도 하겠지만 나는 유럽 여행비용에 큰 보탬이 될 3950 달러를 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Berkeley에 다시 가 보고 싶었고, 또한 Berkeley 대학에서 강사로서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쌘디에고의 내 아파트를 아는 사람에게 세주고, Berkeley 학생아파트에 세를 얻은 나는 승용차에 간단히 짐을 싣고 가족과 함께 이사하였다. 여름학기는 8주간 지속되었는데 매주 닷새, 매일 두 시간 가르치는 것이었다. 가르치는 내용은 선형대수 일부와 상미분방정식이었고, 아침 9시는 강의시간 그리고 11시는 연습시간이었다. 내가 강사와 조교역할을 모두 하는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었다. 영어에는 아직 자신이 없던 나는 매일 학생들에게 강의보충자료를 복사해서 나눠 주었고, 그것을 학생들은 좋아하였다. 매일 수업준비로 강행군해야 했고 토요일에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바삐 지낸 끝에 맞이한 마지막 수업 날에는, 보충자료 준비를 많이 해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야외수업을 하였다. 짧고 바빴지만 즐거웠던 Berkeley에서의 여름방학을 마치고 유럽 여행을 준비하러 나는 다시 쌘디에고로 돌아 왔다.

이리하여 유럽여행비용이 마련되었고 모든 준비는 부푼 기대 속에 잘 돼 갔다. 그러나 밤만 되면 가족을 데리고 떠날 긴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내 머리 속을 무겁게 맴돌곤 하였다. 이러다가 9월초에 나는 아내와 3살 된 아이를 데리고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유학 도중 또 다른 유학의 길에 오른 것이다.

쌘디에고 공항을 출발한 우리가족은 뉴욕과, 매우 추웠던 레이캬비크와 오슬로를 거쳐 오랜 여행 끝에 스톡홀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조그마한 근교도시 Djursholm에 있는 Mittag-Leffler Institut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미국도시만 눈에 익은 나에게 스톡홀름은 낯설고 고풍스런 북구도시였고, Djursholm은 매우 한적한 마을이었다. 마치 지구의 끝에 온 느낌이 들었다.

Mittag-Leffler는 Weierstrass의 제자로서 유명한 해석학자였는데, 그의 예쁜 아내는 많은 재산을 소유하였다. 이 재산으로 세계 최초의 수학 연구소가 만들어진 것이다. Mittag-Leffler의 오래된 3층 대저택에 연구소가 위치했고 근처에 숙소건물들이 있었다. Schoen의 제자 4명의 학생들은 Mittag-Leffler 동생의 집이었던 2층 저택에 함께 머물렀다. 그 집에서 우리는 두 달간 한 가족 같이 공동생활을 하였다. 같이 밥해먹고 커피마시고 술마시고 수학얘기하고 산책하고 스톡홀름 구경하며 지냈다.

가끔 있는 강연을 듣는 것 외엔 연구소에서 하던 일은 그야말로 연구뿐이었다. 그러나 내 학위문제의 해결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오랫 동안 시도해 왔던 방법은 Almgren과 Simon의 논문에 증명된, 길이는 매우 길지만 넓이는 아주 작은 튜브를 다루는 lemma를 내 문제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연구소에서 하루 일을 끝내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오솔길을 걸어서 집에 오던 중 내 머리에 한 산뜻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Fundamental domain의 경계의 극한이 rectifiable 하다고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며칠 후 Weierstrass의 큰 초상화가 있는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나는 그에게 내 연구의 진전에 관해 기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Mittag-Leffler 연구소를 떠날 때 쯤에는, Almgren의 제자였고 그의 아내가 된 Taylor의 논문을 이용하여 fundamental domain의 극한이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있었다. Sweden에 있는 두 달 동안 내 학위논문문제가 거의 다 풀리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11월 초 즐거운 마음으로 스웨덴을 떠나 불란서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나와 가족은 스톡홀름에서 코펜하겐 경유 빠리행 열차를 탔다.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바다를 지날 땐 긴 기차가 동강나서 큰 배에 실려 건넜던 게 인상적이었다. 코펜하겐에서 하루 쉬고 드디어 빠리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빠리 3 대학(옛 소르본느 대학) 근처의 조그마한 호텔에 거처를 정했다. 빠리의 근교 Bures-sur-Yvette라는 조용한 마을에 있는 수학연구소 IHES (Institut des Hautes Etudes Scientifiques)에 지도교수와 동료학생들은 다시 모였다. 내 문제의 마무리를 지은 나는 빠리에서 드디어 학위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문제를 푸는 것과 논문을 쓰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다. 문제를 푸는 과정은 연역적 추론을 정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논문을 쓰는 것은 삼단논법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문제를 풀 때는 수학적인 느낌과 感을 도구로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하고, 논문을 쓸 때는 엄정한 논리만으로 해법을 서술해야 한다. 문제를 푸는 동안은 오랜 좌절과 반복된 착오 끝에 희열이 다가오는 기간이고, 논문을 쓰는 동안은 좀 지겨워서 어서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뿌듯함이 지속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빠리에 한 달 넘어 있는 동안 아내와 나는 박물관, 미술관, 관광명소등을 바삐 둘러 보았다. 나는 원래 미술에 문외한이었으나 기하학을 공부해서인지 뒤늦게 그림작품을 보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오전에 연구소에서 논문 쓰는 작업을 하였고, 오후에 가족과 미술관에서 인상파 명화를 감상하였고, 저녁에 모차르트를 모델로 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았고, 밤에는 카페에서 차 마시며 다시 논문쓰기를 하였다. 이날 같이 수학과 미술과 음악의 창조정신으로 마음을 고양시킬 수 있는 날들을 앞으로도 자주 맞이하게 되기를 나는 기원하였다.

유럽에서의 100일간은 나에게 알찬 기간이었다. 가족까지 데리고 모험의 여행을 한 끝에 뒤늦게 문제 해결의 막차를 타게 된 것이다. 같이 갔던 동료학생들도 대부분 연구에 큰 진전이 있었고, 한 동료는 불란서에서 아냇감을 찾았다. 마음이 풍요로와진 우리들은 12월 중순 따스한 쌘디에고행 비행기에 나른한 몸을 실었다.

빠리에서 쓰기 시작한 졸업논문은 석달이 지나 그 초고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는 unix를 배워가며 논문을 타이핑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논문은 50쪽이 넘어서 지도교수가 읽어 보길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 논문의 요지를 지도교수에게 납득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는 내 논문을 투고할 저널에 대해 얘기해 보았다. 지도교수는 처음에 프린스턴 대학의 A 저널을 얘기하더니 거기는 그와 Almgren의 의견 차이 때문에 안 될 것 같다며 Mittag-Leffler Institut의 C 저널에 투고해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석 달 후 C 저널에서 온 답은 내게 미안하지만 실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삼차원 다양체론에 별 응용이 안된다는 referee의 평을 그 이유로 댔다. 지도교수는 아마도 referee가 Almgren 같다며 이번에는 Journal of Differential Geometry에 투고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1년 이상 지나서야 게재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나의 첫 논문은 1989년에 처음 활자화되었다. 누구나 자기의 첫 논문에 많은 애착을 느낀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자는 첫 논문 이후 더 좋은 논문을 쓰지 못 한다고 한다.

내 첫 논문을 쓴 지 열 두 해가 흐른 지난 봄 갑자기 Almgren의 제자였던 Frank Morgan과 Almgren의 아내 Jean Taylor로부터 나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 들었다. 1년 전에 Almgren이 아쉽게 지병으로 타계하였는데, 그와 인연을 맺은 수학자들에 관해 Almgren이 쓴 글을 각자에게 공개하니, 그 글을 읽고 Almgren 추모의 글을 써 주기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Morgan과 Taylor는 이 글을 모아 인터넷에 띄우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며 그들이 편지에 동봉한 것은 C 저널의 편집장 Hoermander가 내 첫 논문의 심사를 요청한다며 Almgren에게 보낸 편지와, 이에 대해 Almgren이 한 달 후 내 논문을 읽고 Hoermander에게 보낸 심사평이었다. Hoermander는 Almgren에게 내 논문을 A 저널에 실리는 논문들의 수준과 비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대해 Almgren은 심사평에서 내 논문은 수학적으로 옳고, calculus of variations에서 중요한 결과를 담은 논문인데, 삼차원 다양체론에 당장 응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Almgren은 내 논문이 A 저널에 실리는 논문들의 top 50%에는 못 들지만, A 저널에 실렸던 몇몇 논문들과 같은 수준의 것이라고 평하였다. Almgren의 비밀스런 사견을 담은 편지를 공개한 Morgan과 Taylor의 결정도 의외였지만, 내 논문에 대한 Almgren의 평이 12년 전에 내가 추측했던 것 이상이어서 내게는 뜻 밖이었다. 이 일로 나는 그와 나의 인연을 곰곰히 회상해 보았다. 내 논문에서 나는 Almgren의 논문과 그 아내 논문의 결과를 이용하였고, 내 논문을 그에게 보냈더니 매우 좋은 결과이고 내가 기하측도론을 많이 배운 것 같다며 대가답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그는 내 논문의 referee가 됐고, referee의 심사평을 보고 나는 Almgren이 심사인일 것이라고 추정하며 그에 대해 약간의 감정적인 오해를 했고, Almgren 학파 주도의 학회에서 나는 논문발표를 하고 Almgren과 그의 제자들과 처음으로 접하고는 좀 특이하다는 인상을 나는 가졌고,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의 타계와 함께 12년 만에 그의 편지가 내게 공개된 것이다. 수학 자체는 매우 비인간적인 것이지만, 수학을 하며 수학자들과 어울리는 그 과정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인간적인 일들로 점철된다.

앞에서 말한대로 애초에 나는 내 학위논문 문제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었으나 문제를 풀 때 쯤에는 그 문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는 내가 문제 푼 것을 나보다 더 기뻐했다. 나는 내 학위논문에 대해 여기저기 11 군데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강연을 즐기며 하였다. 그런데 내 학위논문 문제에 대해 아쉬웠던 점은 많은 경우처럼 그 후속문제가 있지는 않았던 점이었다. 그리하여 학위논문 이후 새 문제를 찾고서 둘째 논문을 쓰는 데 2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동안 내가 쓴 논문의 적지 않은 부분이 내 학위논문에서 연유한 것이니, 내 첫 논문은 학위논문답게 내 수학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내 학위논문에 지도교수가 싸인하니 다른 논문심사교수 Wu도 선뜻 싸인하였다. 논문 defense 제도는 원래 없었고, 졸업식은 Berkeley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불참하였다. 학위논문을 완성했을 때는 이미 직장 구할 시기를 놓친 때였다. 다행히 다음 해에는 Schoen과 Yau의 postdoctor로서 그들 seminar의 강의록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대학원 생활 마지막 해가 끝난 뒤 여름방학에 나와 아내에게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논문을 여러 편 쓰는 것보다 애를 하나 잘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애가 있으면 좋은 점 하나는, 연구성과가 전혀 없는 때에도 나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므로, 나는 여전히 좋은 성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98년 12월 24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