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학생활 첫 해


로스앤젤레스까지 국제선, 이어서 국내선으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현란한 불빛 속에 밤 늦게 도착하며 9년 동안의 내 미국 생활은 시작되었다. 공항에서 아내와 함께 짐을 찾고 있는데 웬 미국인 부부가 어리둥절해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네가 우리의 host family이라며. 서울을 떠나기 전에 학교의 광고를 보고 host family를 신청하기는 했지만 공항까지 마중 나오리라고는 전혀 기대치 않았었다. 남편 Mark는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대학의 생물학과 학부 학생인데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그 아내는 국민학교 교사였다. 그 부부의 조그만 차에 우리 짐을 가까스로 실은 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만의 기나긴 다리를 건너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낯선 외국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그들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그후 며칠간 신문의 광고를 보고 Mark와 함께 여기 저기 아파트를 찾아나선 끝에 버클리 근처의 오클랜드에서 한 아파트를 구했다. 그리고 풍뎅이 모양의 차 Volkswagen Bug를 샀다. 또 책상, 식기 등의 필수품을 구입하면서 곧 시작할 새 학기를 준비해 나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색다르고 신기하였다. 거리에서 노란 머리, 파란 눈의 미국사람들 사이를 지나다 보면 내가 서양 영화에 출연 중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대학 졸업후 4년 4개월 동안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서 기나긴 군 생활을 하였다. 괴로운 사관후보생 훈련, 총 56대의 빳따, 임관, 첫 강의 경험, 선후배 장교 사이의 긴장과 알력, 동기생들과 수 없이 퍼 마셨던 술, BOQ 생활, 유격훈련, 패기와 절도있는 생도들, 구축함 생활, 동기생보다 1년 연장근무, 제대하며 사관학교를 떠나던 날 등등-- 이것이 그때를 생각하면 얼른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마지막 4년째에 접어들면서 TOEFL, GRE 시험, 운전면허 시험을 치며 유학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결혼을 하였다. 미국의 대학원에 지원한 결과 버클리, 코넬, 미네소타에서 TA로서 입학허가가 왔고, 프린스톤, MIT는 안됐고, 예일은 대기 명단에만 올랐다.

해군생활 중 수학과 영어 공부를 등한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다닐 때 처럼 공부에 쫓기는 게 아니었고 진해에는 몇 집 건너 술집이 있는 터라 인생의 여유로움을 그때 처음 누려 보았다. 그런데 제대하고 스무 날 뒤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보니 나는 어느 새 멋있던 해군 대위에서 바짝 긴장한 유학생 신세로 강등된 것이었다. 눈 앞의 새로운 현실을 바라보며 아내와 나는 치열하게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첫 학기(quarter) 수강과목은 대수학과 대수적 위상수학이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대수학을 좋아 해서 유학 올 때도 대수학이나 정수론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었다. 역시 4년 반의 공백은 메꾸기 쉽지 않았다. 복습과 매주 제출하는 숙제로 힘이 들었는데, 이런 가운데 조교(TA)로서 내가 맡은 연습시간(discussion section)은 해 볼 만 했다. 매주 스물 너댓 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문제를 풀어 주고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는데 교관의 경험이 도움되었다. 문제는 영어였다. 유학오기 전 영어 준비는 꽤 하였지만 한 시간 내내 미국 학생들을 상대로 영어로 진행해야 하는 게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그나마 수학에 쓰이는 영어 위주여서 다행이긴 했다. 그러나 연습 시간의 진행은 영어 실력보다도 조교가 얼마큼 강의 준비를 충실히 해 왔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매주 20시간 이상을 조교 일에 매달리며 공부를 해 나갔다.

정수론에서 오랫 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혹시 그 저변의 논리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수리논리학을 전공해 볼까도 꿈 꿔 봤었다. 그래서 수리논리학 교수와 상의도 하고 그 강의도 잠시 청강해 보았으나 수리논리학에 대해 내가 가졌던 기대는 지나쳤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곧 그 꿈은 포기하였다.

오클랜드에서 두 달간 사니 Berkeley 학생아파트에 자리가 생겨서 그리로 이사하였다. 2차대전 중 부두 노동자들의 합숙소로 쓰였던 낡은 곳인데 매달 월세가 120불 밖에 안됐다. 그곳에 살며 한국 유학생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시동거는 중 차에 문제가 생겼다. 풍뎅이 차는 엔진이 뒤에 있는데 갑자기 엔진에서 파란 연기가 나는 것이었다. 불이었다. 나는 그때 입고 있던 군 작업복 상의를 벗어서 급한 김에 그것으로 불을 끄려 했으나 휘발유에 의한 불이 그렇게 꺼질 리 없었다. 차를 주차했던 곳 앞의 집에서 한 부인이 나오더니 “소방차를 부를까요?” 하는 것이었다. “소방차는 무료입니까?” 했더니 “네, 무료이죠.” “그럼 불러 주세요.” 그 때 옆에 지나가던 차가 멈추더니 아가씨가 나와서 나에게 뭘 전해 주는 것이었다. 소형 소화기였다. 카뷰레타를 마구 태우던 불은 그 소화기로 금방 진화되었다. 조금 있으니 왱 하며 소방차가 와서 소방수들이 마지막 소화작업을 하였다. 내 주위에는 어느 새 여러 명의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아까 그 아가씨가 나에게 또 뭘 전해 주었다. 그녀의 주소를 적은 쪽지였는데 새 소화기를 사서 갖다 달라는 것이었다. 참 고마왔다. 나는 소화기를 두 개 사서 하나는 그 아가씨에게 갖다 주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한국에서 줄곧 내 차에 비치하여서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소화기가 되었다. 처음 풍뎅이 차를 사고 차 보험에 들었을 때 별 생각없이 들었던 약관 중에 comprehensive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차 화재시 보상해 주는 약관이었다. 덕분에 내 차는 불 나기 전보다 좋게 수리되었다.

정신 없이 그날 그날을 지내다 보니 첫 학기가 드디어 끝났다. 학점을 받아 보니 두 과목 모두 A-. 기뻤다. 좋은 성적은 아니었으나 나에겐 그나마 고생한 것에 비하면 기대 이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맡은 연습반의 학생들이 내 강의에 대해 평가해 준 점수는 좋은 편이었다. 그 때 처음 해봤던 강의평가는 나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짧은 겨울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숨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모처럼 스트레스를 풀 겸 조깅(구보)도 할 수 있었다. 그때 구보 도중 입에서 튀어 나온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군가, 상륙전가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군에서의 기합이 빠지지 않은 것이었다. 하기야 지난 학기에 힘들 때마다 나는 진해의 술집을 그리워 하곤 했다. 그리고 또 마음의 낙이 되었던 것은 종종 host family 집에서 서로 준비해 온 저녁을 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점이었다. Mark 부부는 우리 부부와 나이가 비슷해 얘기가 잘 통했고 그들을 통해서 보통 미국인들의 생활을 많이 알게 되었다.

설날이 지나자 흥청거리던 분위기는 갑자기 바뀌고 겨울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미분다양체론과 시험과 숙제가 없는 정수론 특강을 수강하였다. 이번 학기에는 대학원 첫 해에 쳐야 할 예비시험(preliminary examination)이 있어서 또 바짝 긴장되었다. 지난 겨울 방학부터 가깝게 지내던 네 명이 모여서 예비시험을 준비해 오기는 했다. 예비시험은 학부 수학과정을 점검하는 시험으로 까다로운 문제 10개 중 7문제를 골라 4시간 동안 푸는 것이었다. 시험 당일 그럭저럭 문제를 풀기는 했으나 같이 시험친 다른 학생들은 나보다 잘 본 것 같았다. 그 날 집에 돌아와 나는 아내에게 이번 시험에는 떨어질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속으로 괴로웠겠지만 나를 위로해 주었다. 수학과의 한 선배는 풀이 죽어 있던 나를 측은한 듯이 쳐다 보았다. 일 주일 후 발표를 보니 나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성적으로 통과되었다. 이 소식을 아내에게 전화로 알리니 같이 기뻐했지만 아내는 지난 일 주일간 쓸 데 없이 괴로움 속에 지낸 것에 대해 화가 난다고 말했다. 글쎄, 나로서는 버클리 수학과의 학생들이라면 그 정도의 시험은 아주 잘 봤으리라고 짐작해서 미리 겁을 먹었던 것이었다.

같이 예비시험을 준비했던 네 명은 같은 때 유학온 후배,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홍콩 학생, 스페인에서 온 여학생, 그리고 나였다. 후배도 공부를 잘했지만 홍콩 학생의 문제를 푸는 실력은 내 혀를 내두르게 했다. 결국 후배와 홍콩 학생은 제일 좋은 성적으로 예비시험을 통과했다. 스페인 여학생은 아깝게 실패했지만 그 다음 예비시험은 통과하였다. 그런데 정말 납득하기 어려웠던 점은 그 홍콩 학생이 내가 9년후 미국을 떠날 때 까지도 졸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학생은 머리는 아주 뛰어나지만 한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부족했다고 한다.

여기서 첫 해에 나와 함께 연구실을 같이 썼던 동료 학생들에 관해서도 얘기해 보자. 미시시피에서 온 흑인 학생, 오클라호마에서 온 백인 학생, 그리이스에서 온 학생, 그리고 나, 네 명이 설합도 없는 책상을 쓰며 한 방에 있었다. 평소에는 각자 조용히 공부했지만 조교가 일 주일에 세 시간씩 가져야 하는 office hour에는 각자 연습반의 학생들이 많이 찾아 와서 질문을 하기 때문에 방이 그때마다 시끄러워지곤 했다. 한 번은 내 책이 없어져서 한창 찾고 있었더니 흑인 학생이 자기는 그 책을 가져 가지 않았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착한 사람이고 나와도 사이가 좋았고 내가 그를 의심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그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미시시피에서는 흑인들이 얼마나 피해 의식을 갖고 사는 곳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는 내 우편물을 가져 올 때 근처에 있던 백인 학생의 우편함에서 그의 편지도 가져와 전해 주니 그는 고마와 하지는 않고 오히려 불쾌해 하였다. 미국에서는 남의 프라이버시를 조금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걸 나는 뒤늦게 배우게 되었다. 성실하고 열심이던 그 백인 학생은 약사인 아내를 두고 있었다. 그는 아깝게도 예비 시험을 두 번 모두 떨어져 다른 대학으로 옮기고 말았다. 또 논리학을 전공하던 그리이스 학생은 매우 쾌활하고 명랑했는데 조교 일을 한 번 소홀히 했다가 연습반 학생들이 수학과에 불만을 제기하는 바람에 담당 교수에 의해 조교 자리에서 거의 쫓겨날 뻔 하다가 고생 끝에 간신히 살아 남게 되었다. 이 친구들 모두 지금은 중견 수학자로서 잘 지내고 있다 한다.

이번 학기는 미분다양체론 한 과목의 숙제만 하며 지난 학기보다 여유있게 보냈다. 그런데 지난 학기의 대수학과 이번 학기의 정수론을 들어 보니 그 분야에 대해 나는 예전처럼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신 미분다양체론에 흥미가 많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애초의 목표를 바꿔 기하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버클리에는 기하학에 유명한 교수들이 많이 있었다. 내 결정을 듣고 선배는 나에게 S교수를 지도교수로 삼도록 적극 권하였다. 그는 제일 젊고 요즘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는 수학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S교수의 강의에 들어가 보았는데 몇몇 교수를 포함해 많은 학생들이 강의실을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강의 내용은 편미분 방정식의 Schauder 이론이었는데 듣고 있으니 나는 그저 어지럽기만 했다. 그 즈음 내가 좋아하지 않던 해석학 쪽의 이론이어서 였다. 그러나 나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S교수는 기하학의 많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어 그 중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분야가 있을 것이었다. 또 S교수의 인간성이 내 마음에 들었다. 긴 박사과정 동안 지도교수와 긴밀히 접촉해야 한다면 서로의 인간관계 또한 지도교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S교수를 지도교수로 하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그가 나를 받아 들일 것인가는 더 기다려 봐야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당장의 문제는 나에게 기하학의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기초부터 배워야 했는데 학부 미분기하학 과목은 이미 지난 학기에 개설 돼서 내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는 수 없이 혼자 공부하기로 하고 미분기하학의 reading course를 S교수 개별 지도하에 봄 학기에 수강키로 했다. reading course란 학생이 주제를 정해 교수와 1주일에 한 번 만나서 토론하며 스스로 공부를 해 나가는 과목이다. 뒤늦게 미분기하학의 기초부터 많은 양을 빠른 시일 내에 배워야 하는 나에게는 적절한 과목이었다. 또 이 기회에 S교수와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보았다. 교재는 Spivak의 미분기하학 제2권으로 했다. 가끔 S교수에게 찾아가 질문할 때는 워낙 기초적인 것이어서 였는지 그는 내 질문에 답해주면서 종종 자기 일을 보는 것이었다. 수표 쓰기, 편지 쓰기, 전화하기 등등을. 하! 나는 앞으로 참 먼 길을 가야 하겠다는 것을 그 때 뼈저리게 느꼈다. 봄 학기도 마저 끝날 때 S교수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앞으로 좀더 공부하여서 다음부터는 자기에게 배우기 보다 새로운 것을 자기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라고. 나도 그 때가 어서 오기만 기원할 뿐 이었다.

그런데 그 봄 학기에 나는 뜻 밖의 통고를 받았다. 다음 학년도 조교 임명은 세 학기 중 두 학기만 받을 수 있다고. 충격이었다. 조교 담당 교수를 찾아가 물어 보았다. 첫 학기의 학점이 썩 좋지 않았던 게 문제였었다. 예비 시험을 비교적 일찍 통과한 것은 아무 고려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기 명단에 들어 있으니 내년까지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조교를 하지 못할 경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 끝에 이번 여름 방학 때 일을 해 보기로 하였다. 미국 올 때 준비해 온 돈으로 두 세 해는 지낼 수 있어서 당장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돈을 벌며 색다른 경험도 해 볼 겸 내린 결정이었다. 미국 대학에는 학생을 상대로 정부에서 도와주는 work study라는 게 있다. 여름 방학 때 학교 부속 기관에서 일을 하면 그 기관이 임금의 반을 지불하고 정부가 나머지 반을 지급하는 제도여서 학교와 학생 쌍방이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다. 나는 외국인 학생을 담당하는 학교 기관에 신청하여 여름 방학동안 1,500 불을 벌 수 있도록 허가 받았다. work study학생을 모집하는 여러 학교부속 기관의 광고를 보고 나는 몇 군데 찾아가 보았다. 한 곳은 어느 단과 대학의 도서관인데 책 정리를 해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경험이 없었고 영어가 짧아 그 도서관의 일자리는 못 구하였다. 또 한 곳은 생물학과 암 연구소인데 암 세포를 다뤄야 했다. 나에게는 곧 첫 애가 태어나서 내가 많이 돌봐야 하는데 암 세포를 다루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몇몇 곳을 더 알아 봤으나 내게 적절하고 구하기 쉬운 것은 학교의 한 식당의 일자리였다. 주로 접시를 닦고 처리하는 일이었는데 한 시간에 5불 20쎈트를 받는 것이었다. 결국 그 식당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셋째 학기인 봄 학기도 끝나게 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전 해부터 준비해 왔던 대로 우리의 첫 애가 봄학기 끝난 직후 태어나게 되었다. 출산의 모든 비용을 대주는 의료보험을 학교에 등록하자 마자 들어 놓아서 그 보험회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그간 정기검진을 받아 왔었다. 아내와 나는 출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호흡 방법도 미리 배워 두었다. 드디어 출산날이 다가와서 우리는 병원에 달려갔다. 아내의 출산 고통을 나도 함께 느끼고 같이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줄이려 노력하였다. 오랜 시간을 힘들게 같이 보낸 뒤 드디어 첫 애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 출생의 고통을 옆에서 아빠로서 진지하게 겪어 보았던 것이다.

공부는 다소 접어두고 첫애의 기저귀 갈기, 목욕 시키기 등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던 나는 드디어 학교 식당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거기에서 해야 할 일은 주로 식기 관리였다. 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식기를 반납하면 간단히 식기를 닦고 아주 커다란 식기 세척기에 넣으면 곧 깨끗해진 채 나오게 된다. 이것을 잘 분류해 제자리에 갖다 놓는 일이었다. 그리고 식당, 식탁을 청소하는 일과 필요하다면 요리사들을 도와주는 일도 간혹 있었다. 물론 식당의 모든 음식을 원하면 먹을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 그러나 일의 원칙은 철저했다. 자기 카드를 출퇴근시 기계에 넣어 찍으면 출퇴근 시간이 적혀 나와 근무시간이 분 단위로 계산되었다. 또 아침 식사를 하자면 근무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식사를 끝내야 했다. 한 번은 내가 근무 도중 할 일이 없어 수학책을 봤다가 매니저에게 지적받기도 했었다. 일 하는 사람들의 반이 나와 같은 학생들이었고 나머지는 주로 흑인 아주머니들이었다. 영어는 별로 필요하지 않는 일이었으나 가끔 흑인 아주머니가 나에게 이 접시들을 어디 어디에 갖다 두라고 흑인 특유의 영어로 말할 땐 전혀 알아 듣지 못해 난감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렇게 식당에서 매일 8시간 두 달 동안 일하여 1,500불을 받고 나는 그 일을 끝내게 되었다. 식당에서의 일은 지겹지는 않고, 어렵지도 않고 편한 마음으로 계속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은 지금까지 내가 해 본 일 중 몇 안되는 색다른 일로서 지금도 나에게 좋은 경험으로 기억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나는 여름 방학동안 거의 공부를 하지 못하고 보냈다. 그 때문에 다음 해에 쳐야 할 자격시험(qualifying examination)을 한 학기 연기해야만 했다. 한편 다행스러웠던 것은 결국 다음 해 셋째 학기에 대기명단에 있었던 나는 조교 일을 할 수 있었던 점이었다.

대학원 생활의 첫 해, 해외 생활의 첫 해, 첫 애 키우기는 그 하나 하나만으로도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친 나의 유학생활 첫 해는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저 달콤하고 즐겁고 아련한 기억으로만 떠오르게 된다.

(1997년12월11일 씀; 1998년 포항공대 수학과 학생회誌 무한대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