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의 딸

   -최 재 경-

1.
서혁은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사방에는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였고 골목길엔 퇴근 후 귀가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길가의 은행나무 잎은 짙은 노란 색으로 변했고 나무 밑에는 낙엽도 조금 쌓였다. 버스 정거장에서 상당히 기다린 후에야 원하는 방향의 버스가 왔다. 버스 안에는 서있는 사람도 꽤 있었으나 몇 정거장 가지 않아 서혁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승객들이 불편하지 않게 버스 기사는 급발진이나 급감속 없이 운전하고 있었다. 버스 안은 조용했고 가끔 도착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소리만 들렸다. 한 정류장에서는 퇴근길의 손님들이 술과 함께 저녁을 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음식점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서혁은 무심코 자리에 앉아 있다가 아까 버스에 오를 때 종아리가 땅기고 허벅지가 뻐근하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틀 전 서혁은 혼자 도봉산에 올랐었다. 망월사에서 출발하여 포대능선, 자운봉, 선인봉, 오봉을 거쳐 송추로 하산하는 상당히 험하고 힘든 등반길이었다. 단풍이 막바지에 접어든 무렵이라 평일인데도 상당수 등산객이 도봉산 곳곳을 누볐고, 그들의 알록달록한 등산복이 산 전체를 단풍과 함께 물들이고 있었다. 산중턱보다 높은 곳에서는 이미 낙엽이 상당히 져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선인봉 주변에는 측면이라 불리는 벼랑이 있는데 이곳은 두 바위 사이에 수십 미터 낭떠러지가 있는 곳이라서 등산객들은 이 곳을 지나려면 가슴 졸이며 벼랑길을 건너뛰어야 했다. 등산객들의 비명과 탄성이 끊임없이 들리는 곳이었다.

네거리에서 버스가 좌회전을 한 뒤 정거장에 서니 많은 승객이 내리고 탔다. 그 중 두 명은 학생같이 보였는데 바로 서혁 옆에 섰다. 버스 안의 다른 젊은이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스마트 폰을 검지로 스치며 몰두하고 있는데 반해, 이 학생들은 다소 시끄럽게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이들의 행동이 서혁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서혁은 선재와의 30여 년 전 학창시절이 생각났다.

선재는 불문과 학생으로 셰익스피어 희곡강독 과목을 같이 수강하며 만났다. 수학과 학생이 이런 과목을 듣느냐며 궁금해 하던 선재와 서혁은 쉽게 친해졌다. 둘이는 자주 연극, 영화를 보았고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만나서 술도 마시며 소설과 작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주로 선재가 얘기하고 서혁은 듣는 편이었지만. 졸업 후 선재는 극작가의 길을 갔고 서혁은 수학을 계속하여 학위를 받은 뒤 한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학기 중 그는 선재에게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자기가 이번에 연극 ‘외디푸스 왕’의 연출을 맡게 되었다며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디푸스 왕의 대본을 자기는 조금 바꿔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며 난데없이 서혁에게 외디푸스 왕에 나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재미있는 수학문제로 바꾸고 싶다며 좋은 문제가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서혁은 며칠을 고심하다가 그가 보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수학문제 세 개를 선재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선재가 각색한 연극 외디푸스 왕을 오늘 그는 처음 보러 가는 길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테베 시의 입구에 버티고 있던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 이냐고. 이제는 모든 사람이 답을 알고 있는 이 수수께끼 대신 서혁이 내준 문제로 바꾼 연극에 대해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는 매우 궁금하였다.

버스는 로타리를 돌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혁이 이제 곧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이 동네는 그의 모교가 있었던 곳인데 과거의 조용하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극단, 카페, 음식점 술집이 꽉 들어찬 대중적인 거리가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거리에는 평일 밤인데도 수많은 젊은 인파가 오가고 있었다. 이들에 섞여 온갖 간판이 걸려있는 길을 한참 걷고 나니 연극을 공연하는 극단의 전용극장이 눈앞에 보였다. 오늘이 공연 첫날이어서 그런지 극장 입구에 들어서자 이미 도착한 사람들로 일층 홀은 거의 차있었다. 왁자지껄한 속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재였다. 반가와 하는 선재는 평소와 달리 다소 흥분된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서혁은 표를 받고 공연장으로 함께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벌써 좌석은 반 이상이 찼는데 홀에 있는 관객이 들어오면 거의 만석이 될 것 같았다.

한 달 전 서혁은 극단으로부터 연극 포스터를 이메일로 받았다. 이 포스터를 보며 스핑크스의 문제가 다시금 생각나서 연극에 대한 기대감이 사뭇 커지고 있었다. 사실 그날 아침 그는 뜻밖의 나쁜 소식을 이메일로 받았었다. 수학논문을 싣는 저널에서 그가 제출한 논문에 관한 편집인의 의견서를 보내온 것이다. 지난 해 가을 학기를 서혁은 꿈같이 보냈었다. 지난 20여 년간 연구해왔던 문제를 드디어 푼 것이었다. 그것은 디도 여왕의 등주부등식 문제인데 학위논문을 쓴 이후 집중했던 문제였다. 겨울방학 내내 심혈을 다해 논문을 작성해서 봄에 최고 수준이라는 A 저널에 제출했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후 A 저널로부터 논문심사결과를 통보 받은 것이다. 편집인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심사인이 논문에서 치명적인 허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서혁도 그 점에 대해서 며칠간 깊이 생각해보았는데 결국 심사인의 지적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메꾸어 보려고 무척 애썼으나 논리적 허점의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갈수록 확연해지는 것이었다. 이 부등식 문제는 서혁이 그동안 부분적으로 해결해오면서 몇 편의 논문을 썼고 그것이 그의 학문적 업적의 상당부분을 이루었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겨울 그 문제에 관한 최종 완결편의 논문을 쓰면서 큰 성취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하지만 확신이 컸었기에 그만큼 지난 한 달은 서혁에게 심한 좌절의 나날이었다.

어느새 객석은 거의 다 찼다. 선재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었다. 그리고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큰 종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장내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배우들이 하나 둘 등장하며 연극은 시작되었다.

테베 왕국의 왕과 왕비에게 외디푸스가 태어났다. 그러나 왕은 이 아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고심 끝에 어린 아기가 죽게끔 산 속에 내버려둔다. 그것을 어느 목동이 발견하였고 결국은 고린도 왕국의 왕과 왕비가 외디푸스를 키우게 된다. 외디푸스가 청년이 된 뒤 우연히 델피의 신전에서 같은 예언을 듣게 된다. 비극을 피하기 위해 그는 고린도에 돌아가지 않고 근처의 테베 왕국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좁은 길에서 전차를 탄 어느 남자와 서로 길을 비키라고 다투던 끝에 외디푸스는 그 남자를 죽이고야 만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그 남자는 테베의 왕이었다. 테베왕국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스핑크스가 길목을 지키며 행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곤 했다. 그 스핑크스가 외디푸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핑크스: 내가 너에게 세 문제를 낼 텐데 다 풀어야 테베에 들어가고 어느 한 문제도 못 풀면 너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외디푸스: 우선 첫 문제나 한번 들어보자.
스핑크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동그란 공의 겉넓이는 무엇이지?
외디푸스: 마침 해가 머리 위에 떴으니 그 그림자 원의 넓이의 네 배가 되지.
스핑크스: 제법인데. 그럼 1부터 100까지 수의 세제곱의 총합은 무언가?
외디푸스: 그거야말로 쉽지. 1부터 100까지 총합의 제곱이란 말이다.
스핑크스: 허, 무슨 문제를 내든 다 풀 기세이구나. 그럼 마지막 문제는 네가 내봐라, 내가 풀면 너는 끝장이다.
외디푸스: 사람들이 너는 모든 진리를 알고 있다던데.
스핑크스: 그래서 네게 문제를 내보라고 했지.
외디푸스: “……”
스핑크스: 어서 내보라니까.
외디푸스: 너는 옳은 사실을 모두 다 안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틀린 사실도 있지.
스핑크스: 그것을 참과 거짓이라고 하잖아.
외디푸스: 태초에 제우스 신이 올림푸스 산에서 참인 명제와 거짓인 명제를 모두 모아서 번호를 매겼다는 것을 알고 있나?
스핑크스: 그래서 그 번호를 그 명제의 제우스 수라고 하지.
외디푸스: 예를 들어 ‘51은 소수가 아니다’라는 참인 명제의 제우스 수를 123, ‘1+1=3’이라는 거짓인 명제의 제우스 수를 456이라고 하자. 여기서 ‘증명 수’란 말을 정의해 보겠다. 어떤 수가 증명 수라 함은 그 수가 한 명제의 제우스 수이고, 그 명제는 수학에서 증명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123은 증명 수이고 456은 증명 수가 아니지.
스핑크스: 복잡하군.
외디푸스: 그런데 올림푸스 산 허리에 살던 요델이라는 이름의 수학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만족하는 수 n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지. 즉 자연수 n은 ‘n은 증명수가 아니다’라는 명제의 제우스 수이란 말이야.
스핑크스: 왜 이렇게 갈수록 복잡해지는 거야.
외디푸스: 왜냐하면 너에게 참이지만 증명이 안 되는 명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스핑크스: 뭐라고? 진리인데도 증명이 안 된다고? 그런 진리는 없어!
외디푸스: 너는 증명되는 진리만 알고 있군.
스핑크스: 증명 안 되는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너와 나의 목숨이 달려있다.
외디푸스: 아까 요델이 존재한다고 보였던 자연수 n을 73419라고 하자. 그러면 ‘73419는 증명수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명제가 증명된다면 이 명제의 제우스 수 73419는 증명 수가 되지.
스핑크스: 그래서?
외디푸스: 그러면 명제 자신과 위배되지. 따라서 이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단 말이야.
스핑크스: “……”
외디푸스: 너 왜 얼굴이 파래지니?
스핑크스: 그 명제가 거짓인가 보군.
외디푸스: 그렇게 되기만 바라는가 본데 넌 잘못 짚었어.
스핑크스: 그럴리가…
외디푸스: 이 명제를 증명할 수 없으니 이 명제의 제우스 수 73419는 증명 수가 될 수 없는 거야. 바로 이 말이 이 명제는 참이란 것을 얘기하는 거야.

이 말을 하고 외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쳐다보며 만면에 득의에 찬 웃음을 지었다. 스핑크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한참을 서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옆의 큰 나무를 정신 없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가지에 다다른 스핑크스는 외디푸스를 험상궂게 쳐다본 뒤 큰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내던졌다. 그것이 스핑크스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외디푸스의 운명은 처절한 파국을 맞았고 마침내 연극은 끝났다. 배우들의 인사와 함께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배우 못지않게 옆자리의 선재도 동요됐는지 몸을 자주 들썩였다. 객석을 나오는데 선재는 한 관객에게 서혁을 소개했다. 연극의 스핑크스 문답부분을 각색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반갑다는 듯이 “스핑크스의 문제들은 이해하기에 쉽지 않았지만 참신해서 좋았습니다.”

홀에 나오자 선재는 서혁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리니 선재는 배우들을 이끌고 나왔다.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니 배우들과 스태프진 모두가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며 서혁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서혁은 기꺼이 응했다. 극장에서 나와 골목길을 꾸불꾸불 얼마큼 걸은 뒤 무리는 한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홀 구석에 테이블 몇 개가 비어있어서 일행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맥주를 따른 뒤 선재의 건배소리에 모두 힘찬 소리로 제창하였다. 서서히 배우들끼리 그날 공연의 진행에 대한 말들을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선재를 비롯한 스태프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화제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던 서혁에게 외디푸스 역을 맡았던 주연배우가 말을 붙였다.

“스핑크스의 문제들은 수학을 배운지 오래된 우리에게 어려웠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증명 수 문제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사실 그 문제는 수학자에게도 어려운 것이에요.”
이 대답으로 서혁은 좌중의 모든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 배우는 또 물었다.
“실제로 그리스에 요델이라는 수학자가 있었나요?”
“아뇨, 증명 수 이론은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수학자 괴델의 업적인데 제가 이름을 요델로 바꾼 겁니다. 연극에서 제우스 수라고 했던 것도 실제는 괴델 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증명이 가능한 명제는 반드시 참이지요?”
“네, 맞습니다. 그러나 셋째 문제의 핵심은 참인 명제가 반드시 증명 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러자 스핑크스 배역을 맡았던 배우가 말했다.
"스핑크스가 그 문제에 관해 몰랐다는 게 저에게는 인상적이었지요. 한데 똑똑한 외디푸스도 곧 자기에게 닥칠 운명의 사슬을 전혀 낌새를 못 채고 있던 것도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주연배우가 물었다.
“두 번째 문제는 100까지 뿐 아니라 1000까지도 성립합니까? 즉 1부터 1000까지 수의 세제곱의 합은 1부터 1000까지 수의 합의 제곱과 같은가요?”
“네, 맞습니다. 사실은 그 성질이 모든 자연수 n에 대해서 성립하죠. 1부터 n까지 세제곱의 합은 그냥 합의 제곱과 같습니다.”
“흠, 세제곱의 합은 합의 제곱이라… 자연수 사이의 관계가 오묘하군요.”
그 말을 한 주연배우는 좀 더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런데 그 오묘한 관계는 한편으론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자연수 사이에 엄청난 구속이 되는 게 아닙니까?”
이 뜻밖의 관점에 서혁도 다소 어리둥절하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 배우가 계속하였다.
“마치 외디푸스에게 델피의 신탁이 정한 그의 운명이 엄청난 속박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던 그가 난데없는 질문을 하였다.
“외디푸스가 그의 운명의 실상을 깨달은 뒤 두 눈을 찔렀는데, 그렇다면 수학자는 자연수 사이의 본질적 관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합니까?”
서혁은 이 색다른 질문에 대해 곰곰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는 외디푸스의 운명을 예측하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일단 그 본질을 이해하게 되면 수학자는 그 관계에 관한 논문을 씁니다.”
서혁의 이 대답에 다들 무슨 말이냐는 듯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선재가 끼어들었다.
“자네의 대답은 듣고 보니 가히 신파적이구만. 수학자가 하는 일도 극작가의 일과 별로 다른 게 없어. 알고 보니 극작가가 극본을 쓰듯 수학자들은 논문을 쓰고 있네.”
좌중은 선재의 평도 일리가 있다는 듯 모두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맥주집에서 얼마를 더 있다가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공연도 있는 것이다. 바깥으로 나서자 선재는 서혁에게 일방적으로 말하였다.
“죽림에 가자.”
둘이는 학생일 때 학교 앞의 다방에 자주 들렀다. 선재는 젊음의 호기로 그 다방을 죽림이라고 불렀다. 죽림칠현과 진배없는 우리가 들리는 다방이 죽림이어야 하지 않냐며. 혹은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뒤에는 육림이라고도 했다. 주지육림에는 못 가더라도 육림에는 가야 하지 않냐며.

이층에 있는 다방 내부는 옛날과는 꽤 달라졌으나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것은 그대로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하였다. 둘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에 보이는 인도에는 늦은 밤인데도 행인들이 꽤 거닐고 있었고 차도에는 차들의 전조등과 브레이크등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다방 안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는지 서혁의 코를 자극하였다. 그도 학교 다닐 때는 꽤 피웠었다. 선재도 한참 창밖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러더니 서혁에게 시선을 돌리며 준비했었다는 듯 말을 꺼냈다.
“효인과의 사이는 요즘 어때?”
“……”
선재가 효인에 대해서 물어올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서혁은 갑자기 가슴이 메여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방에서 흐르고 있는 왈츠 음악의 삼박자는 서혁의 마음과는 엇박자를 이루고 있었다.

2.
효인은 서혁이 십오 년 동안 동거해온 여자였다.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셰익스피어의 햄릿 공연을 보러 갔을 때였다. 그녀는 오필리아 역의 배우였는데 그 역을 멋지게 연기하였다. 서혁은 고통스런 오필리아의 역을 잘 소화해낸 효인의 연기에 반한 나머지 선재의 도움을 받아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둘은 가까워졌고 결국 동거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둘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므로 서혁은 결혼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효인은 서로 사랑하고 그래서 같이 살고 있으니 우선 그러면 된 게 아니냐고 하며 결혼은 추후에 고려해보자고 말하였다. 연극배우로서의 삶에 집중하고 싶어서 그러려니 하고 서혁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렇게 함께 살면서 서혁과 효인은 서로를 잘 조화시키며 사는 방식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던 중 사오 년 전에는 효인이 지나가는 말로 “우리 결혼해볼까?” 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때는 서혁이 시큰둥하였다. 둘 사이의 삶을 편하게 꾸려왔는데 굳이 결혼이라는 굴레로 서로를 속박하고 싶지는 않다는 핑계를 들어보았다. 그러나 인간사이의 구속은 필요한 면도 있는가 보았다. 올해 들어서 서혁은 효인과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날들이 간혹 생기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혁과 효인의 집에는 불안정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휴일이라 서혁과 효인은 늦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신문과 책을 들고 이것 저것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후에 서혁은 사람을 만날 일이 있어서 일어섰다. 그때 효인은 한 문예지를 읽고 있었다. 화장도 하지 않고 수수한 옷차림의 효인이 전에 없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서혁은 집을 나왔다. 휴일 오후의 인도는 한적했으나 찻길은 평소보다 빨리 달리는 차들로 번잡했다. 서너 시간 일을 본 뒤 서혁은 집으로 향했다. 집 앞의 골목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효인은 서혁의 기척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그 문예지를 읽고 있는 것이었다. 베란다 창을 통해서 비스듬히 비치는 석양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효인의 얼굴에 대조적인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오른 쪽 볼은 발갛게 물들었고 왼쪽 볼은 그늘로 인해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효인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헝클어져 양 볼의 색상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고개는 다소곳이 앞으로 기울어져 두 눈은 책을 응시하였고, 왼 손은 책을 꼭 쥐고 오른 손은 다리 위에 가볍게 놓여 있었다. 두 다리를 꼰 채로 효인은 소파에 포근히 자리잡고 있는 중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효인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거실의 분위기에 어우러져서 신비스러움마저 풍기고 있었다. 이런 효인의 모습이 서혁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한번 안아보고 싶었다.
“효인이 뭘 읽고 있어?”
효인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시 하나 읽는 중이야.”
“잘 쓴 시인가 봐?”
“……”
효인이 읽고 있는 것은 계간 문예지였다. 며칠 전 서혁이 읽으려고 사왔던 것이다. 한 두 달 전에 서혁의 문과대학 동료가 자기의 단편소설이 그 계간지에 실릴 것이라고 소식을 전해서였다. 서혁과 효인은 문학적 취향은 달랐지만 각자 읽은 작품을 서로 이야기 해주곤 하였다. 작품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나누는 시간이 둘에게는 각별하기 때문이었다.

효인이 읽고 있는 시가 멋있는 시라면 그녀에게 낭송을 청해보고 싶었다. 언젠가 서혁의 애송시를 효인이 낭송하던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서혁은 그 시로부터 뜻밖의 감흥을 느끼게 되었다. 서혁에게 익숙한 시상의 흐름에 효인의 낭독은 신선한 느낌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발성훈련을 받은 연극배우의 시낭송은 무언가 다르겠으나 효인은 어떤 새로움을 시에 실어주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서혁은 오늘따라 아름다운 효인에게서 시 낭송을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 시 한번 나를 위해 운치 있게 낭송해 주겠어?”
그렇게 말한 뒤 서혁은 효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정스레 효인을 쳐다보았다. 저녁 햇빛은 효인을 스치듯 지나며 서혁에게 다다랐다. 그런데 효인의 눈가에서 석양 빛이 유난히 반짝이며 아롱지는 것이 보였다. 서혁은 깜짝 놀랐다. 효인의 눈물이었다.
“효인이 왜 그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어느새 눈물은 그녀의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서혁은 그런 효인을 놀라서 쳐다보다가 왼 팔로 덥석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효인은 왼쪽으로 소파 위에 쓰러지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흐느끼는 것이었다. 서혁은 어리둥절해 하였다. 무슨 시를 읽었길래 이렇게 사람이 허물어지나… 그는 불길한 생각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마음을 진정시킨 뒤 효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혁은 말이 없었고 효인은 흐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효인의 흐느낌은 뜸해지더니 이윽고 멈췄다. 한동안 서혁은 무슨 말을 할까 망설였다.
“효인이 무슨 일이 있어?”
그녀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목멘 소리를 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읽은 시 때문이야.”
“그 시가 어때서?”
“그 시는 내가 학교 다닐 때 고향의 남자친구가 쓴 거야.”
서혁의 머리가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효인에게서 고향의 남자친구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서혁과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효인은 가볍게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으나 이내 서혁에게 돌아오곤 했었다. 그 사실을 서혁에게 털어놓고 둘이는 다시금 서로의 사랑을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서혁과 만나기 이전의 남자친구에 관한 고백을 효인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서혁의 입에서 효인에게 묻는 말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그 남자친구와 요즘도 연락하며 지내?”
효인은 냉정하게 대답하였다.
“그 친구는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미 죽었어.”
“……”
서혁과 효인은 한동안 소파 맞은편 벽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효인은 옛 기억을 돌이키는 듯 초점 없는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있었고, 서혁은 오늘따라 사랑스러웠던 효인에게서 전에 없던 신비감과 거리감마저 느끼기 시작하였다. 거실에 흐르던 한동안의 정적은 효인의 큰 한숨에 의해 깨졌다. 곧 이어 효인은 긴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 남자친구 기철과 나는 우리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엔 서로 몰랐지만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같이 하며 가까워졌지. 그때 우리 사이에 사랑이 싹튼 것이야. 원한다면 자주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매주 있던 특별활동 시간에만 만나곤 했어. 문예반에서 일주일간 각자 써온 작품을 발표하거나 자기가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을 낭독하는 시간에 말이야. 감수성이 예민한 문예반원들이 준비한 작품을 발표하는 특별활동시간은 풋풋한 감상에 들뜨던 시간이었지. 그런 예민한 시간은 우리 둘 만남의 시간이었고 정말 애틋한 시간이 되었어. 그렇게 순수한 만남을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이어갔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나는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들어갔고 내 친구 기철은 고향에서 멀지 않은 도시에 있는 지방국립대학에 입학했어. 둘 다 문학과는 상관없는 학과를 선택한 거야. 그렇기는 해도 나는 연극반에 들어가 연극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기철은 시를 쓰기 시작했어. 그런데 대학생활을 할수록 그는 학과 공부보다 시를 쓰는 것에 열중하는 것이었어. 학교가 서로 떨어져있다 보니까 우리 둘은 만나는 일이 뜸해졌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은 갈수록 깊어만 갔어. 그런데 3학년 1학기 도중 난데없이 기철이 휴학하고 귀향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 고향의 다른 친구에게서 들은 바로는 뜻밖에 결핵이 심해져서 그랬다는 것이야. 그래서 나는 중간시험을 일찍 끝내고 고향으로 급히 내려갔지. 만나보니 기철의 얼굴은 정말 병색이 짙었어. 며칠간 우리는 매일 만났어. 한적한 고향 길을 같이 걸으면서 말이야. 기철은 나에게 그간 습작했던 시를 들려주었지. 나는 그에게 학교에서 내가 참여했던 연극 공연 얘기를 해주었고. 같이 추억 어린 고향 길을 걸으며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아봤어. 처음으로 말이야… 다정하게 같이 보냈던 짧은 며칠이 지났고 나는 학교로 다시 올라가야 했어. 그리고 1학기를 우울하게 보냈지.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고향에 내려가서 기철을 다시 만나보니 두 달 전보다 많이 나빠진 것 같았어. 나는 가슴 아팠지만 기철은 내 앞에서 그저 담담한 표정만 짓더군. 그가 아프긴 해도 우리는 만나서 얘기할 때 즐겁기만 했어. 고향에서 같이 학교 다닌 얘기, 도시에서 기숙사, 하숙생활 하던 얘기, 재미있게 읽은 문학작품, 앞으로 읽고 싶은 작품 얘기 등을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두 달간의 여름방학이 지나고야 말았어. 꿈같이 보낸 방학이었지만 내 마음 한 구석은 어둡기도 한 기간이었지. 그렇게 하여 마지막으로 기철과 작별하였지. 그의 표정은 뜻밖에 어둡지 않아서 나도 그와 어렵지 않게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그런데 이틀 후, 그러니까 상경하기 전날 밤 그에게서 연락이 왔어. 내가 떠나기 전 꼭 찾아와 달라고. 즉시 그의 집으로 달려갔지. 기철은 자기 방 앞의 툇마루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어. 내게 공책 하나를 건네주는 거야. 자기가 그 동안 쓴 시가 담겨있다며 내게 주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는 다음 겨울방학 때 꼭 만나자고 했어. 나는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의 손을 꼭 잡기만 했어. 그의 집을 나서서 우리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르기만 했어.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나는 기철이 준 공책을 꺼내 그의 시를 읽어보았지. 첫 장에 ‘효인에게’라고 써 있었어. 그 다음 장에는 고교시절부터 쓰기 시작한 시가 처음부터 또박또박 적혀 있는 거야. 곳곳에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고는 했지만 말이야. 처음의 시는 단순했지만 꽤 서정적이었어. 대학에 입학한 이후는 어느 정도 성숙한 시가 됐다고 할까? 그런데 기철이 휴학하고 낙향한 이후에 쓴 시는 매우 무거운 분위기였어. 그 중에서 몇몇 시는 내가 읽어봐도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어. 기철만의 독특한 서정을 빼어난 언어로 써내려 갔다고 할까. 한데 어떤 시에서는 나를 암시하는 듯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어. 내 가슴은 뭉클해졌지.

2학기 동안 나는 기철의 노트를 자주 펴고 그의 시를 읽으며 그를 눈앞에 그려보곤 했지. 그런데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나는 기철의 어머니에게서 슬픈 전갈을 받았어. 기철이 전날 죽었다고. 갑자기 위독해져서 내게 미리 연락할 틈도 없었다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슬픔을 안고 나는 고향에 내려가 장례식에 참석했지. 고향 뒷산 양지바른 곳에 기철의 작은 묘가 마련됐어. 그날따라 낙엽이 많이 져서 방금 메운 흙 위를 어수선히 덮었지. 남은 사람들에게서 기철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지워주려는 듯이 말이야. 기철의 어머니께서 퉁퉁 부은 내 눈을 보며 하시는 말씀이 집에 들렀다 가라는 것이었어. 툇마루에 앉아 기철의 방을 들여다 보니 지난 여름 그대로였어. 갑자기 기철의 목소리가 들릴 듯 했어. 그때 그의 어머니가 내게 누런 종이 몇 장을 건네줬어. 기철의 시라고. 그가 지난 여름 이후 쓴 것인데 나에게 꼭 전해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다는 거야. 그 종이를 내 주머니에 힘들게 집어 넣었지. 그러나 나는 그 시를 몇 달간 읽을 수가 없었어. 그냥 내 책가방 속에 기철의 시 공책과 함께 누런 종이를 넣고 다니기만 했었지. 차마 읽을 용기가 안 났다고 할까. 어쩌면 읽지 않은 시를 남겨 둠으로써 기철이 아직 살아있다는 착각을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와서 4학년 1학기가 시작됐는데도 나는 아직 그 누런 종이에 적힌 시를 책가방 속에 간직해두고 있기만 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등교 길에 정신 없이 서두르다 그만 내 책가방을 잃어버리고 말았어. 어머니가 사준 예쁜 가죽 가방을 누가 훔쳐간 거야. 내 책과 기철의 공책과 누런 종이가 들어있던 그 가방을. 가방을 도난 당한 뒤 며칠을 나는 넋이 나간 듯 보냈어. 아직 읽어보지 않은 기철의 시를 잃어버리고 나니 그가 이번에는 정말 내게서 아주 먼 곳으로 영영 떠난 것이라는 깊은 상실감에 빠지고야 말았어. 그 누런 종이는 쓸쓸했던 나를 살아있던 기철과 이어주는 가느다란 종이 끈과 같은 것이었어. 결국 그런 절망 속에서 나는 대학을 졸업했어. 그 후 나는 극단에 들어갔지. 그리고 연극배우로서 연기에 집중하면서 나는 기철과의 슬픈 추억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어. 그러고 있을 때 나는 자기를 만난 거야. 자기와 같이 살며 나는 기철에 대해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었지.

그런데 말이야, 기철이 죽은 뒤 19년이 지나고 오늘 그 계간지를 읽게 되었어. 그러다가 신인상 발표난을 우연히 보았지. 그런데 시 부문 신인상 수상자의 이름이 박기철이라는 거야. 혹시나 하고 당선자 소감을 읽어보았는데 나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 어떤 사람이 오래 전 우연히 공원의 벤치에서 책을 비롯한 몇 가지 물건을 주웠대. 그 중에서 공책과 종이에 여러 편의 시가 적혀있었는데 그 시를 읽고 그 사람은 정말 감명을 받았대. 그런데 그 공책의 주인인 듯 적힌 박기철이라는 이름은 아직 등단한 시인이 아님에 분명했대. 그렇게 그냥 이십 년 가까이 그 시를 간직하며 즐겨 읽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시들을 주인대신 발표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났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박기철 본인의 이름으로 다섯 편의 시를 골라 문예지 신인상 공모전에 응모해주었대. 그렇게 해서 기철의 시가 신인상에 선정된 거지. 문예지 측은 신인상을 결정하고 응모자에게 알아보니 본인이 응모한 것이 아니어서 처음엔 주저하였다는군. 그러나 아직 미지의 시인 이름으로 제출한 주옥 같은 다섯 편의 시 말고도 더 많은 시들이 적힌 공책과 종이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시상을 결정하였대. 저자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기철의 시에 지면을 할애해 줄 방침이라는 거야. 당선작으로 세 편의 시가 실렸더군. 그 중 한 편을 읽어보니 내게 어렴풋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었어. 기철의 공책에서 반가운 기철의 언어가 되살아나 내게 말하고 있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지. 나머지 두 편의 시는 처음 본 시인데 그 누런 종이에 적힌 시임에 분명해. 공책에 적힌 시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어. 초연함, 달관, 비장함이 묻어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누런 종이에 적힌 시로부터 나는 그간 기철의 소식을 새로 듣는 것 같았어. 19년 만의 발견으로 기철이 다시 살아나온 듯 한 착각마저 들었어. 아… 이게 현실인가? 아니면 내가 어떤 연극에 출연하고 있는 건가?”

효인이 마침내 긴 이야기를 끝냈다. 그리고 긴 숨을 내쉬었다. 해는 어느새 지고 거실은 어둑어둑했다. 집 바깥의 가로등 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어슴푸레 비춰주고 있었다. 서혁은 거실의 불을 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효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효인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첫사랑이 19년 만에 저 세상에서 홀연히 나타나 그녀에게 아름다운 시를 들려주다니. 서혁은 자기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를 효인의 가죽가방에게 빼앗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혁과 효인은 점점 어두워지는 거실의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베란다 창밖에는 별들이 하나 둘 나타났고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인 문예지 표지의 글자들은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이후 서혁과 효인은 서로 마주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마주치더라도 짧은 대화만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서혁이 일어나 거실에 나가보니 효인은 이미 외출한 뒤였다. 요 며칠 항상 그랬다. 효인은 아침부터 밤까지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거실 테이블 위에 쪽지 하나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효인이 쓴 것이었다. 꽤 정성 들여 또박또박 쓴 글은 다음과 같았다.

서혁씨,
요즘 서로 말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한가지 일로 바쁘기는 했지만. 그동안 기철의 시가 실린 문예지를 통해서 대신 시를 응모해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요. 우선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가져온 기철의 공책과 그 누런 종이를 봤어요. 내 책도 아직 보관하고 있더군요. 나는 그 사람에게 나와 기철의 관계를 얘기하고, 그는 이미 죽었고, 그가 죽기 직전 나에게 준 공책 등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얘기했지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애원했어요. 기철이 쓴 것을 내게 돌려달라고. 그 사람은 처음에 거절했지요. 내 책만 돌려주겠다고. 그래도 나는 시인이 쓴 원고는 시인이 원래 의도했던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냐며 며칠간 그 사람에게 간절히 호소했어요. 결국 나는 그 사람에게서 기철의 공책과 누런 종이를 받아낼 수 있었죠. 대신 두 부의 복사본을 만들어서 그 사람과 문예지가 나눠 가졌어요. 공책과 종이를 다시 손에 쥐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자기는 상상할 수 있겠지요? 이런 기분을 솔직하게 얘기해서 미안하군요.
그리고 자기에게 내가 고백해야 할 것이 있어요. 나 오늘부터 고향 부모님 집에 내려가 살고 싶어요. 서울 생활이 이젠 내게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자기 곁을 떠나는 것, 연극단 활동을 중단하는 것, 둘 다 가슴 아파요. 그런데 여기 삶이 너무 힘들어요. 다 이해해주기 바래요.
안녕, 효인

서혁은 지난 며칠간 불길한 감이 들기 시작하긴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는 무력감만 들었었다. 그런데 오늘 효인의 쪽지를 읽고 보니 현실은 현실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효인의 방을 보니 상당수의 짐은 남아있으나 꼭 필요한 짐은 꾸려 가져간 것이었다.

효인이 보름 전 이렇게 떠난 이야기를 서혁은 선재에게 잠긴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하였다. 서혁이 얘기하는 동안 선재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으로 서혁을 위해 얼굴 표정을 바꾸었다. 선재는 오늘 첫 공연의 성취감에 매우 들떠있었고, 그 기분을 연장시키기 위해 서혁을 데리고 치기 어린 마음으로 죽림다방에 온 것이었다. 갑자기 변한 상황에 그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서혁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디 가서 한잔 하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