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브로이의 입자와 파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천지창조 이후 밝은 낮에 인간의 모든 행동에 관여해온 빛은 언제나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빛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같은 의문에 처음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17세기의 뉴튼 이었다. 그는 빛이란 반짝이는 물질로부터 나온 매우 작은 입자들의 자취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자설에 대해 동시대인 후크는 빛의 파동설을 주장하며 뉴튼과 격렬한 논쟁을 하였다. 그러나 1830년경 굴절, 간섭, 회절이란 빛의 성질이 파동설로 쉽게 설명되자 빛의 입자설은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5년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설을 과감하게 되살리며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빛을 금속표면에 쪼이면 전자가 튀어나오게 되는 현상을 광전효과라고 하는데 이전의 빛 이론으로는 이 현상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양자라는 입자로 보며 광전효과를 정확히 해석하였고 그는 결국 이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아인슈타인의 과감함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대담무쌍한 생각을 품게 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인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였다. 그의 논법은 다음과 같았다. 빛이 파동이며 입자라면 전자와 같은 입자가 동시에 파동이 아닐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혁명적인 이론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었고 일부는 코메디 프랑세즈라고 부르며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만은 드브로이 이론이 그 단순함과 일반성 때문에 자명한 이론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드브로이가 큰 베일의 한 구석을 들어올렸다고 웅변적으로 평가하였다.

드브로이는 프랑스 역사상 유명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은 17세기 이태리에서 프랑스 왕들을 섬기기 위해 이주하였다. 드브로이 가문에서는 여러 명의 군사령관, 정치가, 외교관이 나왔다. 루이 14세는 드브로이 가문에게 세습작위를 하사하였고, 첫 공작의 아들은 7년전쟁에서 프러시아를 패배시킨 공으로 신성로마제국의 Prince 칭호를 하사받았다. 19세기에도 드브로이 가문은 탁월하였는데 그중 드브로이의 할아버지는 쿠데타에 의해 수상이 되었다. 이 할아버지는 과학이란 늙은 남자의 매력에 그럭저럭 만족해 사는 나이든 여자와 다름없다는 특이한 견해를 가진 인물이었다.

루이 드브로이는 1892년 디에프에서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루이는 귀엽고, 잘 생기고, 명랑하며 장난꾸러기인 어린아이였다. 스무 살 위의 누나가 남긴 회고록에는 어릴 적 루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루이는 웃는 얼굴, 장난끼 많은 눈, 곱슬머리를 가진 날씬하고 매력적인 아이였다. 파란 벨벳 상의에 반바지를 입고 까만 스타킹과 빛나는 구두를 신고 응접실에 나타날 때 루이는 그야말로 동화 속 어린 왕자같이 보였다. 온 집안에는 그의 쾌활함이 넘쳤다. 저녁 식사시간에는 원래 조용히 해야 함에도 루이는 하고 싶은 얘기를 억누를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재잘거리곤 하였다. 다른 형제와 나이차이가 많은 다소 외로운 환경 가운데 자란 탓인지 그는 책을 많이 읽고 공상 속에서 살았다. 기억력은 비범하여 고전극 전장면의 대사를 열정적으로 암송하곤 하였다. 루이는 역사 중에 특히 정치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부모님이 정치 이야기를 할 때면 신문기사를 토대로 즉석에서 연설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제삼공화국의 장관이 수시로 바뀌었는데도 모든 명단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정치가로서 루이의 밝은 미래를 그의 누나는 기대하였다.

드브로이 가문의 전통대로 루이의 교육은 가정교사가 맡았다. 그러나 루이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른한 살 형의 충고를 따라 루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삼년 후 철학과 수학의 자격증을 받고 졸업하였다. 형 자신이 젊었을 때 자신에게 가해진 압박감으로 부자유로왔기 때문에 가급적 동생에게는 엄격한 교육을 강요하지 않았다. 형의 회고에 의하면 루이는 프랑스어, 역사, 물리학, 철학을 잘 했고, 수학, 화학, 지리학에는 무관심했고, 미술, 외국어는 못했다고 한다.

열여덟 살에 루이는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하였다. 무엇을 전공할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군인이나 외교관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처음에는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나 비판 없이 지식만 전달하는 그 당시의 교육방식으로 곧 흥미를 잃고 말았다. 이후 공직에 뜻을 두고 법학을 일년간 공부하였으나, 루이는 포엥카레의 인식론적 걸작 ‘과학의 가치’와 ‘과학과 가설’을 읽고 자신의 천직을 이론물리학에서 찾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소르본느에서 가르치는 물리학은 지적 모험심을 자극하거나 최근의 연구동향을 전해주지 않고 단지 표준과목을 엄격하게 훈련시키는 정도였다. 다행히 포엥카레가 전기역학, 열역학, 천체역학 등의 고급이론물리학을 가르쳐서 이들 과목에 루이는 꼭 출석하였다. 루이는 문학계에 이미 알려진 스무 살 위 누나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 루이가 스무 살 때 누나가 결혼한 뒤 정서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루이는 어릴 적 쾌활함과 기백을 잃는 등 성격의 변화를 겪었다. 일반물리 시험에 낙제한 뒤 자존감을 잃었고, 제일차 솔베이 양자론학회 논문을 읽으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회 논문을 자세히 공부하며 그는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고 이론물리학자가 되어야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루이 드브로이는 나이가 되어서 군에 입대하였는데 곧 일차대전이 발발하여 결국은 육년간 군복무를 하였다. 처음에는 공병으로 시작하였으나 형의 영향력으로 에펠탑의 밑에 있는 무선전신부대로 전속되었다. 여기서 얻은 실무경험은 나중의 과학연구에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고 드브로이는 말하곤 하였다.

1919년 군에서 제대한 드브로이는 랑쥬벵 교수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을 배웠고 이 이론의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형의 사설 실험실에서 형과 함께 X 선, 광전효과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형이 X 선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기 1년 전에 브래그 라는 부자 물리학자들은 X 선이 입자의 성질을 가질 때가 있고 파동의 성질도 가질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바 있었다. 드브로이의 형도 이 사실을 실험적으로 확인하였고 동생에게 이런 상황을 자세히 전해주었다.

형과 많은 토론을 한 드브로이는 실험물리학자인 형과 달리 이론물리학자로서 X 선의 이중성을 심도있게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대자연은 대칭성을 갖고 있다. 자연 속에서 빛은 어떨 땐 입자로서 또 다른 땐 파동으로서 반응하는 이중적인 성질을 띈다. 대자연이 대칭적이라면 물질도 이러한 이중성을 갖고 있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 양성자, 원자 같은 입자도 어떨 때는 파동같이 행동할 것이다. 이와 같이 드브로이는 입자-파동의 대칭성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을 바탕으로 당시 물리학계의 화두였던 원자 내 전자궤도의 안정성, 움직이는 입자에 동반하는 파동, 전자에 수반하는 회절현상 등을 설명하였다.

자연의 한 현상을 설명하기위해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는 것은 범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론의 아름다움을 근거로 기존의 것을 버리고 혁명적인 가설을 도입하며 이제까지 보지도 못한 현상을 예측하는 것은 비범한 일이다.

드브로이에 의해서 시작된 파동의 혁명은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락, 보른에 의해 양자역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입자는 한 개의 점이 아니라 공간에 확률적으로 흩어져있는 존재이며, 파동함수라고 불리는 이 흩어짐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입자에 동반하는 물결 같은 파동이라는 것이다.

디락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희망이 연구를 인도할 뿐 아니라 그들의 두려움도 연구를 인도한다. 이들에게는 자기의 연구결과에 치명적인 결함이 내재해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따라다닌다. 유능한 과학자는 매우 침착하고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자기의 아이디어를 합리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과학자도 인간에 불과하여 기대가 크면 두려움도 큰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연구과정은 매우 혼란스럽고 주의력은 끝없이 흐트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초기의 20년간 양자론의 발전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입자-파동의 이중성이었다. 어떻게 빛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입자와 파동으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신비하며 모순적인 이중성에 맞설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처음이었다. 또 이 이중성이 물리학에 야기한 근본적 결점이 모든 이론체계를 붕괴시킬지도 모르는 상황 하에서 이에 혁신적으로 대항한 사람이 드브로이였던 것이다.

드브로이는 자기가 전개한 이론을 모아 1923년 지도교수 랑쥬벵에게 학위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그의 이론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랑쥬벵은 아인슈타인에게 이 논문 소식을 전하였다. 깊은 인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에게 한없는 존경심을 전하였다. 그러나 보어와 그의 동료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드브로이가 예상한 입자를 동반하는 파동인 물질파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다. 그 무렵 미국의 두 회사는 진공관에 관련된 유명한 특허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법정공방에서 웨스턴 일렉트릭 회사가 이기도록 도운 실험실의 두 과학자들은 이와 관련된 실험을 계속하였는데 계속 이상한 결과만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한 실험결과들은 전자가 입자라는 가정을 버리고 파동으로 해석하는 브래그 방정식을 이용하니 잘 설명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발견하였다. 1926년 그들은 옥스포드에서 열린 영국과학회에서 우연히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을 듣게 되었다. 이로서 그들은 이상한 실험결과의 이론적 토대를 찾았고, 아울러 드브로이는 상상적 물질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1928년 막내아들이 천재라는 사실도 모르고 드브로이의 어머니는 그가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을 가진 채 운명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드브로이 가문에 또 다른 영광이 주어졌다. 드브로이가 파동역학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는 1933년 소르본느 대학의 석좌교수가 되었고 그 후 30년간 재직하였다. 어머니 사망 후 드브로이 가문의 궁전은 팔리고 드브로이는 빠리 근교의 대저택으로 이사하여 60년 가까이 독신으로 조용히 살았다. 어릴 때부터 Prince 칭호를 유지했던 드브로이는 1960년 형 모리스가 죽은 뒤에는 공작직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포엥카레처럼 좋은 책을 많이 저술하여서 과학자로서는 드물게 문학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선출되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과 광양자설로부터 드브로이의 위대한 발견이 비롯된 것인 만큼 그는 아인슈타인을 절대적으로 숭배하였다. 드브로이의 형이 드브로이에게 친구같고 보호막같은 형이었다면 아인슈타인은 그에게 정신적인 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브로이는 가르치는 일을 매우 고귀하게 여겼다. 강의록에서 발전한 책은 매우 잘 씌어져서 좋은 계몽서적이 되었다. 자기의 이론을 전달하는 강의에는 심혈을 기울였으나 강의자체는 별로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정확한 시간에 시작하여 높은 목소리와 단조로운 말투로 강의한 뒤 정확한 시간에 끝내고 곧 강의실을 떠났다고 한다. 세미나는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두 일어선 가운데 한 명씩 악수를 하고나서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드브로이는 1987년 아흔다섯 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200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