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수리과학연구소(EIMS)가 교육부 중점연구사업 후속과제에 선정된 것을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EIMS는 지난 22년간 설립목표로 삼은 수리과학분야의 융합연구에서 알찬 성과를 꾸준히 이루어 왔습니다.
앞으로도 EIMS 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결실을 거둘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저는 10년 전에 이화여대 수학과에서 한 학기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 관심을 갖고 이화여대 수학과의 소식에 귀 기울여 왔습니다.
이번에 EIMS Letter 를 창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리과학연구소에 들려드릴 이야기로서
스웨덴의 Mittag-Leffler 연구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써보았습니다.

Mittag-Leffler 연구소 이야기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교외에 있는 Mittag-Leffler 연구소는 1916년 수학자 Gosta Mittag-Leffler 가 설립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학책과 저널을 수집해온 그는 자신의 멋진 저택에 수학연구소를 세워 수학자들이 열정적으로 연구할 분위기를 만들려는 평소의 꿈을 실현하였다. Mittag-Leffler 는 26살이던 1872년 웁살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3년간 해외방문연구 기회를 주는 펠로우십을 받고 빠리와 베를린을 방문하여 Hermite, Liouville, Poincare 와 교류하고 Weierstrass 의 지도를 받았다.

해외방문연구의 결과 Mittag-Leffler 는 10년 후 그의 유명한 정리를 발표하였다: 임의로 주어진 pole 을 갖는 meromorphic function 이 존재함을 증명한 것이다. 이것은 주어진 zero 를 갖는 holomorphic function 이 존재한다는 Weierstrass 의 정리에 대응되는 정리라고 볼 수 있다.

Mittag-Leffler 는 베를린에서 돌아와 1876년 핀란드의 헬싱키 대학 교수로 5년간 재직하였고 곧 이어 스톡홀름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헬싱키에서 만난 부유한 가문 출신의 스웨덴 여자와 결혼하였다. Mittag-Leffler 는 스웨덴 국왕의 보조금과 아내의 재산을 토대로 수학 저널 Acta Mathematica 를 창간하여 45년간 주편집인으로 활약하였다. 해외방문에서 쌓은 친분으로 그는 Cantor, Poincare 등 저명한 수학자들의 논문 여러 편을 초기에 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의 요인으로는 풍부한 재정과 정치력, 넓은 인맥 뿐 아니라 수학 논문의 quality 를 파악할 줄 아는 그의 뛰어난 판단력을 꼽을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Mittag-Leffler 의 가장 유명한 정리가 Acta Mathematica 에 발표된 1884년, 러시아의 여성 수학자 Sofya Kovalevskaya 가 그의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같이 Weierstrass 의 지도를 받았었다. Kovalevskaya 는 괴팅겐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여성이라는 제약 때문에 강사 자리를 구하지 못하였고, 이에 실망한 그녀는 이후 6년동안 연구를 멀리 하였다. 딸이 태어나 2년간 육아에 전념한 Kovalevskaya 는 다시 수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천재적인 수학자가 대학에서 자리를 못 구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Mittag-Leffler 는 그녀에게 스톡홀름 대학의 강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5년 후 Kovalevskaya 는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여성 수학자가 박사학위를 받은 것과 정교수가 된 것 모두 유럽 최초의 기록이다. 이렇게 Kovalevskaya 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지원했을 뿐 아니라 Mittag-Leffler 는 여성의 권리신장에 각별히 노력하였다. 그는 1903년 노벨상 추천위원으로서 물리학상에 Pierre Curie 가 거론될 때 Marie Curie 도 공동수상하도록 주장하여 수상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원래 그의 성은 Leffler 였으나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을 사랑한 나머지 어머니의 성 Mittag 을 추가하여 자기의 성을 Mittag-Leffler 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Kovalevskaya 를 Acta Mathematica 의 편집인으로 임명하였다.

Kovalevskaya 는 러시아의 장군이었던 아버지와 명문가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외국어 교육을 받았고 10살 때 그녀 방의 벽에는 미적분 강의노트를 붙여 놨다고 한다.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본 부모의 배려로 수학 개인교습을 받기도 하였으나 수학을 너무 좋아하여 다른 공부를 소홀히 하자 아버지는 수학 개인교습을 중단시키기 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언니와 함께 nihilism(허무주의)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다. 언니 Anna 는 결국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에 투신하였다.

18살 Kovalevskaya 는 대학에 입학하려 했으나 여학생을 받아주지 않는 대학정책에 막혔다. 그래서 서유럽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이 또한 장벽에 부딪혔다. 아버지나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득이 그녀가 받아들인 타협안은 고생물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는 8년 연상의 남자와 서류상의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우선 갔고, 3학기 동안 Kovalevskaya 는 수학과 물리학을 청강하였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의 추천으로 Kovalevskaya 는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서 Weierstrass 의 지도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도 여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고 Weierstrass 는 궁여지책으로 Kovalevskaya 를 개인지도 하기 시작하였다. 4년 후 그녀는 뛰어난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초기조건을 만족하는 해석적 편미분방정식의 해석적인 해는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그 유명한 Cauchy-Kovalevskaya theorem 이 학위논문의 업적이다.

최고의 학위논문을 쓰고도 대학교 강사 자리를 얻는 데 실패한 Kovalevskaya 는 초등학교 여학생 산수 선생님 자리를 제안 받았으나 포기하였다. 구구단 곱셈을 잘 못해서 그랬다고 그녀는 고백하였다. 졸업한 지 1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Kovalevskaya 는 서류상의 남편과 몇 년간 실질적인 부부로 지내기로 합의하였다. 3년 후 Kovalevskaya 는 딸을 낳았고 2년간 육아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딸을 친척에게 맡기고 Kovalevskaya 는 남편을 떠나서 수학연구를 재개하였다. 남편은 조울증 증상으로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던 중 주식 사기사건에 연루돼 심적 고통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Kovalevskaya 는 죄책감에 빠졌으나 수학연구에 전념하며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쳐나왔다. 바로 이때 그녀에게 Mittag-Leffler 가 스톡홀름 대학의 자리를 주선해준 것이다.

Kovalevskaya 는 스톡홀름에서 연구와 강의, 대외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rigid body 의 회전에 관한 중요한 논문으로 French Academy of Science 의 Prix Bordin 을 수상하였다. Euler, Lagrange 이후 세번째로 중력 속에서 회전하는 팽이가 integrable 한 경우를 발견한 것이다. 워낙 뛰어난 연구결과여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상금을 3000프랑에서 5000프랑으로 인상해 수여하였다. 이 연구를 더욱 확장하여 Kovalevskaya 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도 상을 받았고 같은 해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Kovalevskaya 가 몇차례 지원했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그녀에게 대학 교수직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인생의 절정에 이르렀던 Kovalevskaya 는 안타깝게도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에 온 지 7년이 지난 그녀 나이 마흔 한 살 때였다.

Kovalevskaya 는 문학적인 자질도 있어서 자서전 (A Russian Childhood), 자서전적 소설 (Nihilist Girl) 을 출간하였고, 친하게 지내던 Mittag-Leffler 의 여동생과 두 편의 희곡을 공저로 발표도 하였다.

필자는 대학원생 마지막 해에 지도교수를 따라 Mittag-Leffler 연구소를 두 달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학위논문 문제를 해결하였다. 나의 증명에 관해 지도교수에게 설명하던 연구실 벽에는 Weierstrass 의 큰 초상이 걸려 있었다. Mittag-Leffler 의 3층 옛집은 매우 고풍스러웠고, 그의 위풍당당한 동상 근처에서 그의 아름다운 아내의 초상화를 본 기억이 남는다. 한편 필자는 대학생 시절 Kovalevskaya 의 짧은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 그녀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그림을 자기 방의 벽에 붙였다는 내용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필자는 몇년 전 Mittag-Leffler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여전히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젊은 수학자들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었다. 시간은 바뀌었으나 공간은 그대로이고 구성원은 활력에 넘쳤다. 수학은 끊임없이 무르익고 있었다.

이화여대 수학과 EIMS Letter 창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