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과학원의 두 학자


5월 중순 어느 날 늦은 저녁, 한 사람이 내 연구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이 사람은 이름이 E라고 하였다. 그는 며칠 전 저녁 고등과학원 1호관 5층 위 옥상에서 열린 뱅큇에서 나를 봤다고 말했다. 멀리 있는 산들을 가만히 응시하던 나를 보고 자기의 오래 전 기억이 되살아나 나와 얘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궁금해진 나는 앞장서는 그를 따라 갔는데 E가 다다른 곳은 그 옥상이었다. 해가 지기 직전 불그스름한 구름은 서쪽 하늘을 덮고 있었고 북서쪽에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E를 쳐다보니 그는 말을 시작하였다. E는 대학 3학년 때부터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7년이 지난 5월 중순 어느 날 번개가 치듯 문제의 해답이 떠올랐다. 뉴턴이 프린키피아 서두에서 주장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있을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 경험으로 우리는 시간의 동시성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고. E는 우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와 저 멀리 북한산을 가리켰다. 북한산에 있는 사람이 인식하는 시간과 공간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느끼는 시간과 공간과는 다르며, 두 시간과 공간은 각각 독립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E는 문제의 해답이 떠오른 다음 날 친구 베쏘를 만나자마자 외쳤다고 한다. ‘내가’ 마침내 문제를 풀었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시간은 빛의 신호를 주고 받으며 관측자 마다 정해지는 것일 뿐이라고. E는 그때에도 친구 베쏘에게 언덕 위에서 두 마을의 시계탑을 가리키며 그의 해답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며칠 후 E는 내 연구실에 다시 찾아왔다. 여전히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E는 내게 자기 친구 G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E와 나는 한참 걸어 8호관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양복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쓴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G는 이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좋아해서 매일 타본다고 내게 말하였다. 그가 투명 엘리베이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럿셀과 화이트헤드를 포함한 논리학자들은 모든 수학적 진리는 보편적 논리체계로부터 연역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학자 힐버트는 모든 수학 문제들은 증명할 수 있거나 반증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G에 의해 이러한 믿음과 주장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증명 불가능한 진리가 존재함을 보인 것이다. 수학에서는 공리로부터 출발하여 정리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이다. 즉 주어진 논리체계 안에서 공리를 이용하여 정리를 증명하는 것이 논리학자와 수학자의 일상작업이다. 그러나 이 논리체계 밖에 있는 진리, 즉 증명할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G가 보인 것이다. 이 진리는 논리체계 밖에 있어야 한다. 논리체계 안에 있다면 이것은 증명 가능하거나 반증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투명한 엘리베이터의 얘기로 돌아가보자. G는 엘리베이터를 논리체계로 보았다. 지상층(0층)에는 공리가 있고 1-4층은 정리로 이루어졌다. 공리를 이용하여 정리를 증명하는 것은 엘리베이터의 운행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명 불가능한 진리는 논리체계 밖에 있어야 하니 엘리베이터 바깥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투명 엘리베이터에서만이 바깥에 있는 증명 불가능한 진리를 볼 수 있으니 G가 8호관의 엘리베이터를 애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때 나는 차를 마시러 1호관 4층의 토론실로 갔다. 이때쯤엔 텅 비어있는 곳인데 이날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바로 E와 G였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대뜸 하는 말이 고등과학원의 커피타임에 나오는 다과와 과일은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 덕분에 고등과학원 토론실 커피타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욱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E와 G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 이론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가 양자역학에 관해 논쟁하다가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설파한 것은 유명하다. 그런데 G는 E의 이 말이 증명 불가능한 진리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G는 화제를 바꾸어 자기의 물리학 업적을 내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G는 E의 일반상대성 이론 방정식을 풀어서 ‘G 우주’ 라고 불리는 특이한 우주의 존재가 가능함을 보였었다. G 우주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닫힌 곡선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우주에서는 놀랍게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E의 일흔 살 생일에 G는 선물로 G 우주 존재 논문을 헌정하였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G의 논문의 결론으로 인해 한때 E는 자기의 이론에 회의도 품었었다고 전해진다.

갈수록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던 E와 G는 결국 종이컵의 커피를 다 마셨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천천히 일어섰다. E가 말하였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G가 존재한다고 증명한 바로 그 우주라고. 그래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G도 내게 말하였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시간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시간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마침내 E는 담담히 말하였다. 자기는 스위스 베른 특허청에 근무하기 시작할 때의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G는 비엔나 대학교 학창시절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나는 E와, 그리고 G와 작별의 악수를 하였다. 고등과학원 토론실에 타임머신이 있었는지 E와 G는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프린스톤에 있는 연구소 IAS에서 아인슈타인과 괴델은 15년간 같이 재직하였다. 27년의 나이차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가까웠다. IAS에서 아인슈타인과 괴델은 매일 출퇴근길을 같이 걸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노후에 말하길, 연구는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IAS 연구실에 들르는 이유는 괴델과 같이 걸어서 출퇴근하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한편 괴델은 신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였으며,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었다고 전해진다.

과학의 지평(2016년 54호)